Hit Me Hard and Soft / Billie Eilish

 Hit Me Hard and Soft / Billie Eilish

빌리를 찾아서



정규 3집 앨범 <Hit Me Hard and Soft>를 제대로 들어보기 전에, 역시 이토록 개성 있는 뮤지션 빌리 아일리시에 대해 잘 모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빌리 아일리시의 음악을 ‘소비’하던 방식은 어디까지나 스트리밍 구조 속에서 간접적이고 우발적인 탐색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앨범에 대한 이해보다 특정 곡이 눈에 띄면 들어보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내게는 적절해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식의 다소 의욕이 경감된 청취 태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곡을 들어도 빌리의 노래들은 하나같이 임팩트 있고, 스타일리시하다는 사실을 캐치할 수 있었다.

  다소 느슨하게 감상했던 그녀의 곡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있었다. Everything I Wanted와 영화 <바비> 사운드트랙에 삽입됐던 What Was I Made For? 등이었다. What Was I Made For?의 경우, 텔레비전에서 그래미 어워즈 시상식–2024년 2월 5일 Mnet에서 생중계를 했다–을 보던 중 라이브 무대를 통해 처음 접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문득 피아노 소리가 들려 화면을 쳐다보았는데, 나는 처음에 선글라스를 끼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며 재치 있게 위장한 이 여가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https://youtu.be/vluXkyV4AFc?si=DrmbFdUYaUAsI3cv). 하지만 노래의 첫 소절부터 단번에 내 귀를 사로잡은 건 분명했다. 그때까지 영화 <바비>를 감상하지 않은 나로서는 What Was I Made For?라는 노래의 기원을 알지 못했고 뒤늦게 곡의 사연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다. <바비>의 감독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이 빌리와 피니어스에게 ‘바비의 심장 노래’를 만들고 싶다며 곡을 써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빌리의 음악들이 세워진 시청각적 스크린 앞을 여러 번 스쳐 지나갔다면 What Was I Made For?는 무심코 가던 길을 멈춰 세우고 그쪽을 향해 돌아보도록 만든 노래였다. 그토록 현란했던 컨셉과 소재들, 저돌성과 저항성 등은 옅어지고 그녀는 진솔함과 감미로움을 입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곡은 2집 <Happier Than Ever> 이후 창작자로서 다소 위태로운 시기를 겪던 뮤지션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Hit Me Hard and Soft>는 금문교에서 몸을 던지는 악몽을 모티브로 삼았던 Everything I Wanted를 떠올리게 만든다. 혹은, 그 곡이 이미 경험되었기에 이번의 물속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감상의 층위가 더욱 두터워졌고 복합적이 됐다. Everything I Wanted의 뮤직비디오(https://youtu.be/EgBJmlPo8Xw?si=RcfhjxE0WIEROHma)는 두 주인공 빌리와 피니어스가 차의 앞좌석에 나란히 탄 채 물속으로 서서히 달려가는 하나의 시퀀스를 구성한다. 그 당시 빌리가 겪던 우울증에서 비롯된, 이 곡에 깃든 그녀의 아이디어에 관해 불편함을 느꼈던 피니어스는 이 곡을 상호 협력의 메시지로 전환했다고 한다. 누군가 죽고 싶다고 느낄 때 다른 누군가 곁에 같이 있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빌리는 <Hit Me Hard and Soft> 커버 작업을 위해 의상과 액세서리를, 체온 유지 슈트와 물속으로 가라앉도록 무게를 지우는 웨이트 등을 착장하고 6시간 동안 이어진 수중 촬영을 했다고 하는데, 눈을 뜬 채 물속에 머물러야 했던 촬영은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여기에서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는지 모른다. ‘나를 강하고 부드럽게 쳐'라는 의미의 타이틀은 자살 충동의 반대편에 자리한 생존 욕구 같은 양가적인 감정이나 지독하게 사랑해서 오히려 독이 되어버리는 순간의 오류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날 무심코 방문을 열고 그녀는 깊은 물속으로 추락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에게서 사라지는 꿈. 저항하기 어려운 에너지의 원천인 물, 불가능의 외피 아래에서 서럽게 요동치는 꿈. 그것은 죽음 반대편에 자리한 인간의 특성을 되살린다.


확실히, <Hit Me Hard and Soft>는 한층 성숙한 음악으로 꾸며져 있다. 보컬은 특유의 웅얼거림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역과 발성으로의 성공적인 도약을 보여준다. 중심 주제가 되는 것은 사랑이다. 연인과의 사랑, 동성과의 사랑, 늘 힘이 되어준 음악 파트너인 오빠에 대한 우애 등, 그녀가 느끼는 여러 사랑들에 관해 솔직하게 풀어낸 느낌이다. 하지만 역시 빌리 아일리시의 크리에이션답게 사랑의 모습들은 어딘가 부서져 있고 결핍을 드러내면서 완성되는 비극을 반영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영감을 얻어 쓰인 Chihiro를 이 앨범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름과 인물의 정체성이 긴밀히 연결되었던 영화 속 이야기를 노래의 밑바탕에 배치하며 사랑의 박탈과 엇갈림 등을 사유한다. 내러티브를 최소화한 뮤직비디오에서는 사랑에서의 폭력적 이미지를 추출한다. 

  Birds of a Feather는 한 톤 밝은 비트와 멜로디의 팝튠이지만 여전히 발아래에선 슬픔의 파도가 철썩인다. ‘우리는 같은 부류의 사람, 우리가 함께여야만 하는 걸 알아(Birds of a feather, we should stick together, I know)'를 전제하지만 화자는 결코 무한하지 않은 생과 현실의 수많은 장벽들을 바로 자신의 눈앞에 불러 모은다.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이 피학성을 통해 무감각한 우리에게 일깨움을 준다고 느낀 순간, 이것이 참된 예술적 태도로 이해되는 윤리성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이 어린 가수에게 경외감이 드는 기분도 느꼈다.

  The Greatest는 놀라운 음악적 변화를 반영하지만 내세우지 않는 겸양의 트랙 같았다. 저녁의 차분함에 젖어들도록 인도하는 듯한 도입부에서 서서히 한 계단씩 오르며 마침내 드라마틱한 스케일의 크레셴도에 이른다.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이곳에 그려진 사랑은 비즈니스적이다. 기브 앤 테이크와 보상의 논리가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밤을 새우고 잠이 쏟아질 것만 같은 순간 마지막 몽상에 취해 욕구마저 하얗게 태워 소각시키는 듯한 과정을 목격하도록 만든다.


빌리는 이 앨범에 대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에 비유했다. 어린 나이의 성공이라는 대운과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지만 한편으론 잃는 것이 있었다. 그 나이라면 누구라도 핀잔을 들어도 좋을 만한 느긋함으로 자신의 내면과 주변에 관해 성찰할 기회를 가진다. 그런 시간은 십 대 시절에 주어지는 재산에 가깝다. 주어지는 것들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깊은 갈망이 일렁인다고 그녀는 느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바비 인형이 그런 생각을 더욱 부추겼을까?) 누구도 쉽게 오르지 못하는 산의 정상에 오른 그녀가 다시 산을 내려와 잊은 물건들을 되찾는다면 그건 타당하지 않은 역행이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보여준다. 거꾸로 돌려야 하는 시간에도 어김없이 고통이 따랐고 여전히 다음을 믿어도 좋다는 것을. 마지막 곡 Blue에서 그녀는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이제 끝났어 / 그런데 다음 노래는 언제 들려줄 거지?(It’s over now / But when can I hear the next one?)’. 두고 떠나온 뒤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으니, 이제 빌리는 이미 올랐던 산의 정상에 다시 오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참조

https://youtu.be/vluXkyV4AFc?si=94CPleDNPGLFkwik

https://williamdrumm.com/

https://www.npr.org/2024/05/17/1251790138/billie-eilish-finneas-hit-me-hard-and-soft-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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