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ves Soundtrack / Christopher Bear & Daniel Rossen
Past Lives Soundtrack / Christopher Bear & Daniel Rossen
두고 떠나온 것을 다시 만난다면
한국 사람들은 일상에서 ‘인연'이란 말을 자주 쓴다. 그것은 대체로 농담처럼 사용되고 긍정적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 우연히 자주 마주치면 사람들은 상대에게 ‘우리는 인연이 있다, 혹은 인연이 깊다'와 같이 표현하며 예기치 못한 해프닝을 익숙하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인다. 때때로 사람들은 관계가 끝났을 때에도‘인연이 다했다' 하고 표현하며 돌려 말하기도 한다.
인연이라고 하면 일종의 섭리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친구, 연인, 부부, 가족. 문득 나와 가까운 자리를 맴도는 얼굴들을 떠올려 보면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인연 이론을 평범한 관계에 대입하는 것은 관계를 강화시키는 확실한 동기가 된다. 단지 마주치고 스치는 가벼운 관계도 실은 모두 인연이라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관계에도 마법처럼 깊이가 더해질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의 인연에는 더욱 강한 끌림이 동반된다. 누군가 물어보면,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왜인지 모르지만 상대에게 끌리고, 어쩐지 상대가 좋다. 그건 어쩌면 수천 번의 삶이 반복되는 동안 일어난 마주침들이 관계의 이면에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 아닐까.
<패스트 라이브즈>는 표면상으론 첫사랑과의 재회를 사려 깊고 세련된 필치로 그려낸 영화다. 그리고 심층적으론 서양인들에게 이 독특한 동양적 관계관인 ‘인연' 개념을 심플하면서도 매우 시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 ‘인연' 개념은 기독교 문화가 우세하여 발전해 온 서구 사회에는 좀처럼 전해지지 않은 불교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현생에서의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전생의 여러 겹의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 본다. 그중에서도 부부의 연은 무려 8천 겁의 인연으로 맺어진다고 한다. 서양 관객들은 비록‘인연'이라 정의된 낱말을 찾지 못해 그 느낌에 관해 어렴풋이 간직하고만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통해 마침내 그 느낌을 파악하고 명명하게 될 수도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첫사랑에 대한 참신한 스토리다. 동시에 그것이 가까움과 멀어짐, 나아가 생사를 초월하는 일에 대해 매우 고전적인 취향으로 어필한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영화에 대해 보다 디테일하게 알아보자. 셀린 송(Celine Song) 감독이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시나리오를 써 나가게 된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린 시절의 사랑을 간직한 나영과 해성 두 사람이 나영의 이민으로 인해 멀어지게 되고, 시간이 흘러 서로를 찾게 되면서 재회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과 한국, 서로 다른 대륙에서 살아가면서도 페이스북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화상 통화를 하며 반갑고 즐거운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번의 교류는 실질적 만남으로 이어지진 못한다.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각자 해야 할 일이 있고, 각자의 일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영은 현실 속에서 배우자가 될 아서를 만나 특별한 갈등을 겪지 않고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아서는 그들이 일군 현실 타협적 부부관계가 나영이 해성과 맺을 수 있었을지 모를 순수한 관계에 비해 열등하다는 식의 감정을 느낀다. 나영과 해성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듯한 끈끈한 정서적 연결은 그가 나영과 경험할 수 없는 종류의 것임을 이해하고 있음도 세밀히 그려진다. 로맨스 영화로서 드라마를 부각해야 하므로 이야기는 나영과 해성 관계에 포커스를 두지만, 나영과 아서의 관계도 결코 인연이 아니라고 여길 수는 없다. 몬탁(Montauk)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운명처럼 만난 두 사람. 한적하고 평화로운 정원을 가로질러 나영의 앞에 나타난 아서.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도 전생들의 인연이 쌓이고 쌓여 현생에서 부부의 연을 맺기에 이른 셈이다.
나영과 해성의 드라마틱한 관계에 이룰 수 없는 첫사랑이라는 일종의 통념적 테마를 대입한 것은 한국인의 정서에 잘 들어맞는 설정이 아니었을까. 이데올로기나 편견의 치우침 없이, 사랑의 오리지널리티를 세심히 재현해낸 듯한 구성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걸림돌이 되는 시간의 침범을 받지 않으려 한 듯 시간의 경계를 희미하게 처리한 것도,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을 관통하는 긴 사랑의 한 단락에 해당하는 듯 보이도록, 영화를 하나의 흐름으로서 이해하게 되는 괄목할 만한 성취였던 것 같다.
다음 생이란, 정말 있는지 알 수 없고 있다고 해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마침내 해성이 뉴욕 땅에, 나영의 눈앞에 나타났고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찾을 수 없다. 정말 다음 생이 있어서 다시 만날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때는 서로가 어떤 모습일지도 모르고,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현생의 깊은 사랑은 분명 다음 생에 영향을 가할 것이며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강한 끌림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도 이번처럼 엇갈려 버리는 건 아닌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나영은 바로 그 자리, 자신의 터전에서 해성을 놓아줄 수밖에 없다. 다음 생이란, 죽음을 포함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상상할 수도 없는, 죽은 이후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다. ‘잘 가'라고 하지 않고 ‘다음 생, 그때 보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따뜻하고 서러운 작별 인사가 되어버린다.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활동해온 인디 록 그룹 그리즐리 베어(Grizzly Bear) 멤버 가운데 두 사람, 크리스토퍼 베어(Christopher Bear)와 다니엘 로센(Daniel Rossen)이 사운드트랙 스코어를 맡았다. 셀린 송 감독이 연극계에서 작가 일을 오래 해오다 이 작품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 것처럼, 오랜 밴드 메이트인 두 사람도 <패스트 라이브즈>를 통해 영화 음악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감독과 음악 양측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것도 영화에 조용히 힘을 보탠 협력적인 요소가 아니었을까.
사운드트랙은 15개의 스코어와 하나의 노래로 구성되었다. 미니멀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시간에 관한 풍부한 사유를 반영하던 영화의 미학처럼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구분을 오묘하게 중첩시키며 빚어낸 이색적인 스코어 음악들이다. 마치 사랑을 잃은 후에도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도록 만들며, 상실의 아픔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마지막에 수록된 노래는 샤론 반 에튼의 Quiet Eyes이다.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으로, 샤론 반 에튼과 라나 델 레이 등의 싱어송라이터들의 음악을 제작해온 잭 도스(Zach Dawes)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당신은 내게 너무나 현명한 사람’, ‘당신의 조용한 두 눈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해’, 이와 같은 노랫말들이 마음에 남았다. 이룰 수 없던 것들, 대상과 나의 차이, 대상과 나의 거리 따위를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도록, 이 노래는 상심의 거친 길을 걸을 때 기꺼이 동행해 줄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인 바 신을 떠올려 보자. 해성, 나영 그리고 아서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카메라는 반대편에 앉은 다른 손님이자 관객의 자리에 놓여 있다. 이것은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비밀 이야기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왠지 영화가 이어지는 동안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모른다.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OC2Di9oz21w
https://www.youtube.com/watch?v=pUKMPHfAeAw
https://web.archive.org/web/20230712104745/https://thewire.in/film/past-lives-movie-review-dilemma
https://www.kodak.com/en/motion/blog-post/past-lives/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