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urs Soundtrack / Philip Glass

 The Hours Soundtrack / Philip Glass

비극적 이야기들이 꿰어진 띠



종종 밤에 영화를 보려고 넷플릭스를 탐색한다. 대단히 열정적인 태도로 볼거리를 찾는 것은 아니라 확실히 캐주얼한 태도인데, 얼마 전 우연히 영화 <디 아워스>가 눈에 띄었다. 2002년 처음 개봉한 이 영화를 이미 몇 번 본 기억이 있지만, 이번에는 음악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라는 뚜렷한 명분을 가지고 다시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다. 참 신기한 것은, 영화를 보는 시기마다 관객으로서 내가 특별히 주목했던 부분들이 달랐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크게 세 가지 시간대의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시간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 쓰인 마이클 커닝햄(Michael Cunningham)의 소설 <The Hours>를 원작으로 삼았다. 그의 소설 속에는 소설을 집필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시간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영화 속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는 1923년, 로라 브라운이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우울과 심리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1951년, 그리고 로라의 아들 리처드가 인정받는 시인이 되지만 병이 든 채 힘겹게 살아가는 2001년–중심인물은 리처드의 옛 연인이던 클라리사–의 이야기가 뒤섞여 흘러간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종일관 신경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소설 집필로 인해 자신의 머릿속 공상에 많은 시간 빠져 지내기 때문에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는 곧잘 트러블을 겪는다. 클라리사는 문학 편집자로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당당하고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는 뉴요커의 모습을 보여주고, 두 여성에 비해 로라는 자신의 연약함을 위장할 만한 구실이나 수단이 부족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로라는 주부이고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첫째 아이를 돌보며 틈틈이 소설책을 읽는 것 말고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없다. 그녀의 슬픔은 흐트러짐 없는 머리 모양과 옷차림, 몸짓과 눈빛, 목소리를 통해 마치 형체를 얻은 듯 흘러나오고, 어린 아들의 장난과 웃음소리로 가득해야 할 집 안엔 불안한 침묵이 감돈다. 엄마의 슬픔은 어린 리처드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녀는 베이비시터에게 아이를 맡기고 호텔 방에 들어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결국 두 아이들을 두고 가정을 떠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시간이 흘러 리처드가 죽은 뒤 클라리사를 찾아온 나이 든 로라가 말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므로 후회를 하는 것도 의미 없다고.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관해 클라리사에게 초연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남편도, 아들도, 딸도 모두 죽었고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가장 죽고 싶어 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는데, 자신이 삶을 택한 뒤 그들 모두가 하나 둘 떠나갔다고. 그녀는 자식을 두고 떠난 용서 받을 수 없는 엄마로 마치 자신의 과오에 대한 대가를 치르듯 가족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와 같은 권선징악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은 이 장면이 거의 유일하다. <디 아워스>는 통념적으로 금기시되는 소재들을 예술적 상상력, 혹은 픽션 속에 풀어 놓으며, 혼돈스럽지만 확고하며 타당한 저마다의 사연들 속을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사건을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아우르면서 사건이 벌어지기까지의 전후 흐름에 노출시킨다. 정신 질환, 퀴어와 에이즈, 자살, 실존적 위기 등의 소재들을 유려하게 조명하며 비통한 삶의 시간들과 예술을 보다 깊이 있는 층위에서 고찰하도록 이끈다.

  영화를 더욱 슬프게 채색하는 키워드는 ‘파티'가 아닐까. 영화 속에서 세 여성은 모두 파티를 준비한다. 버지니아는 런던에서 오는 언니 바네사와 조카들을 맞이하기 위해, 로라는 남편 댄의 생일을 위해 케이크를 만들기로 하고,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준비한다. 파티는 소란과 기쁨을 상징하는 친목 수단이지만, 어쩐지 인물들의 파티는 소설가의 검푸른 잉크 속에 한 번 빠졌다 나온 듯 어둡고 불운한 빛깔을 띤다. 필립 글래스의 스코어 음악들은 바로 그러한 곡조를 그려내며 영화에 미적 성취를 더하고 있다. 사운드트랙을 듣는 동안 아름답고 슬프고 가혹한, 이라는 느낌이 공명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필립 글래스는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자서전 <음악 없는 말>에 그의 인생사가 꾸밈없는 태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시카고 대학 졸업 후 뉴욕에 도착해 생계를 위해 공장일이나 트럭에 짐을 싣는 등의 노동을 하며 줄리아드 평생교육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게 되고, 나중에 정식으로 작곡과에 등록하게 된다. 명문 음악 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음에도 음악에 대한 탐구심은 그를 더 모험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나디아 불랑제에게 가르침을 받고 라비 샹카르를 만나 인도 음악까지 바운더리를 확장하게 된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혁신적인 재즈와 록 음악, 인도 음악 등을 두루 거친 독특한 음악 여정이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이식되어, 그는 새로운 어법의 오페라와 심포니, 영화 음악들을 창작해 오고 있다. 특히 그의 음악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패턴의 활용이다. 그는 단순한 패턴을 나열해가고 변주하며 한 편의 곡을 완결해나간다. 패턴으로 인해 멜로디는 쉽게 각인되고 반복 구조를 취함으로써 겨우 그 주변 자리를 맴돌게 하는 것 같지만, 큰 폭을 그리는 선율들을 통해 마음은 부풀어 오르며 감정적 맥동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조금 독특하게 느껴졌던 것은, 굉장히 전위적인 음악가로 손꼽히는 그가 생계를 위해 공장일이나 트럭 짐 싣기, 택시 운전 같은 고된 노동을 해왔다는 사실이었다. 마흔이 될 무렵까지 이십 년 넘도록 음악은 음악대로, 일은 일대로 해오며 버틴 셈이다. 하지만 그는 고된 노동을 즐기면서 했다고 서술한다. 그런 그의 성숙한 태도가 내게는 놀랍고 존경스러운 것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예술가가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본다면 그건 분명 흥미로운 발견이 될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중요한 비밀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종종 예술 작업의 고상함이나 우월성 때문에 돈벌이라는 것이 하찮고 비루하게 취급되거나 중요성이 축소되기도 하는 것 같지만, 그에게 예술적 창작 행위와 돈벌이는 비등한 가치를 지녔으리란 사실을 들여다보게 했고 그건 충분한 영감이 되는 것 같았다.

  단순한 패턴들이 비슷한 변주로 이어지고 사라질 때, 겹쳐지고 서로 어울리고 멀어질 때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가 반복되고 변주된다는 느낌을 되새기게 된다. 인간이 결코 거머쥘 수 없는 갈망에 관해, 백 번을 오르면 아흔다섯 번쯤 미끄러질 수 있는 처절함에 관해 말하는 듯한, 삶에 드리워지고 있던 장막들 아래를 기어코 들여다보게 된 기분이 들었다. 말 없는 음악이 할 수 있는 말은 언제나 예상을 초월할 것이다. 필립 글래스의 <디 아워스> 스코어 음악은 영화의 주변에서부터 중심을 향해 번져가면서 시간적으로 서로 떨어진 무거운 이야기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눈부신 띠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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