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in the Pitch / Jessica Pratt

포크 싱어송라이터 제시카 프랫의 네 번째 앨범 <Here in the Pitch>는 비평가들과 대중, 그리고 그녀의 음악을 기다려 온 팬들로부터 환영받기에 충분했다. 2012년 발표한 셀프 타이틀 앨범부터 3집 <Quiet Signs>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자신만의 미니멀하고 마이너한 사이키델릭 포크 성향의 음악을 통해 생과 시간에 관한 주제들을 탐구해 온 뮤지션은 <Here in the Pitch>에서 약간의 음악적 변화를 추구하면서 다소 대중적인 포크 사운드를 선보인다. 이전까지 좀처럼 개입되지 않았던 드럼 등 퍼커션 악기들과 신시사이저가 절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한 혁신이 가장 두드러지는 트랙은 아무래도 앨범의 첫 곡이자 리드 싱글이었던 Life Is일 것이다. 단조롭지만 생기 있는 드럼에 이어 기타도 단지 리듬의 일부인 듯 심플하고 짧은 스트로크를 반복하면서 노래가 시작된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괴기스러운 개성을 지녔다. 결코 우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굴곡과 음영이 있지만 어린아이 같기도 한 목소리라고 할까. 변화가 담긴 음악과 함께 클래시컬한 포크 음악의 틀 속으로 불어넣은 개성적인 보이스, 그리고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노래 속에 그리고 있는 주제일 것이다. 뮤직비디오와 함께 감상해 보면 Life Is와 The Last Year에서 그녀가 형상화해낸 세계가 시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사실을 거의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시간의 겹과 무한한 되풀이 속에 부유하는 물질처럼 존재는 불현듯 자신의 유일성을 초월한다. 상식적으로 하나라고 믿고 있던 존재가 프리즘에 투과된 듯 여러 겹으로 나타나고, 끝없이 반복되는 듯한 시간의 루프 속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 다니기도 한다.



이제는 무엇이 동양적이고 서양적인지에 대해 구분 짓는 일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앨범도 그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한한 시간을 사유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사상을 떠올릴 수도 있고, 어쩐지 동양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퍼커션 리듬으로 서양 음악보다 동양의 민속음악에 대해 더욱 친근히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어렴풋이 파악되는 것들 중 무엇 하나가 특별히 강조되지 않고 조화 속에서 함께 나아간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선전하거나 주장하는 일의 지극히 반대편에서 생에 관한 질문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혼돈의 실타래를 덩어리째로 수용한 담담함을 반영한 흔적을 드러내는 일에 가깝다. 마치 순간순간 바람과 빛의 움직임에 의해 모양을 달리하는 그림자들을 이어 노래로 만든 것 같은 찰나의 휘발성 아쉬움과 본질적 자연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The Last Year에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이어나간다. 그러니까, 한 토막의 시간이 변주도 없이 무한히 되풀이된다. ‘다 괜찮을 것 같아 / 우리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 그리고 스토리라인은 영원히 이어져 / 그리고 내가 볼 수 있는 거리는 / 당신과 나 / 나는 내 마음의 모든 변화들과 함께 사라져버렸어(I think it's gonna be fine / I think we're gonna be together / And the storyline goes forever / And the distances I can see / It's you and me / I'm gone with all the changes in my mind)’. 어쩌면 우리가 있는 곳은 ‘영원히 이어지는’ 스토리라인 속인지도 모른다. 이 노래는 분명 익숙지는 않은 그러한 생각들에 도전해 볼 만한 빌미를 만들어준다.

By Hook or by Crook에서는 보사노바 리듬과 조화를 이룬 그녀의 몽환적인 포크 보컬을 음미해 볼 수 있다. Nowhere It Was는 멜로디가 거의 없이 앰비언트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가고 Empires Never Know에서는 빈티지 피아노와 함께 신비로운 풍경을 그려낸다.

<Here in the Pitch>는 전작 <Quiet Signs>처럼 런타임이 고작 27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여백 없이 뼈대로서만 완성에 도달해간 레코드인 셈이다. 그녀는 정말 과묵한 타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반드시 해야 할 말, 강조되어야 할 말은 단어로 함축되어 있다. ‘나는 세기의 햇빛이 되고 싶어 / 나는 자유로운 우리 감각들의 흔적이 되고 싶어(I want to be the sunlight of the century / I want to be a vestige of our senses free)’, World on a String의 가사에서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초월적인 시각을 간명하게 그려냈다. 제시카 프랫의 <Here in the Pitch>는 형식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템포와 피치에서, 거기에서부터 풀려나온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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