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penheimer Soundtrack / Ludwig Göransson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신화 속 인물처럼 대단히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영화 오프닝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에 관한 이야기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에게 주었다. 그 죄로 그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영원히 고문을 당해야 했다.’와 그의 사연은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오펜하이머의 평전 제목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고문'은 타인들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부여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는 ‘저는 제 손에 피가 묻은 느낌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러자 대통령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폭탄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누가 투하 명령을 내렸는지요’, 하고 단언하며 그의 나약함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정말로 영화에선 그를 죄책감으로 몰고 가는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는다. 비록 오펜하이머에게 악감정을 품은 스트로스가 그의 권한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된 듯 심문하는 정부의 그림자가 그의 앞에 잔뜩 드리운다고 해도 그것들은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자기 내부의 충돌과 붕괴로 스스로에게 형벌을 부여하는 형세가 된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전까지 영화에 그려진 오펜하이머가 쌓아온 시간을 반추해 보면 그는 열등감과 우울증에 시달려온 나약한 존재였다. 그가 우울증에 시달린 시기는 케임브리지 시절이고 닐스 보어의 권유로 옮겨 간 괴팅겐에서는 물리학도로서 일취월장하며 활발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분위기에 따라 인간성이 급변하는 민감한 성격은 그를 지극히 ‘양자적' 인물처럼 보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괴팅겐 시절의 적극적인 마인드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그 계획을 성사시키는 원동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은 프로젝트가 성공에 이르기 전까지만 유효해 보인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맡은 임무인, 물리학자로서 원자 폭탄의 현실화에 목적을 두지만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협력했던 미국 정부의 목적은 폭탄을 제조시킨 뒤 그것을 실제화 해 적을 항복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 협력했을지라도 그 지향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의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뒤, 오펜하이머는 괴로움에 빠져들고 한층 더 깊은 고뇌와 씻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비록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지휘한 장본인이었지만 그것이 야기한 인명 피해를 윤리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는 이후 수소 폭탄과 핵 무기 개발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을 표하게 된다. 비단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원자 폭탄의 개발과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연쇄 반응’이 시작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충분히 모순적으로 비치는 그의 행보와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던 과거 이력은 매카시즘의 영향 아래에서 미국 정부로부터 소련의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결국 청문회가 열리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요 줄거리이자 오펜하이머의 다소 비극적인 운명의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비극성이 그를 영화에 매우 친화적이도록 만든 영화의 주요 재료라 본다면, CG 사용보다 실제 상황을 촬영하기를 추구하며, 촬영이 여간 쉽지 않은 대형 장비인 IMAX 카메라를 고집한 촬영 기법은 형식 면에서 탁월한 시각 효과를 낳았고, 그로 인해 보다 웅장한 이미지 연출과 인물의 미세한 표정까지 담아낼 수 있었다. 바이올린과 신시사이저가 결합한 독창적인 사운드트랙은 무게감이 남다른 이 작품에 힘을 실어주었다. 스코어 작업은 대본이 완성된 직후 시작되어 작곡가가 편집 과정에 긴밀히 참여해 수정되면서 점차 다듬어져 갔다.

영화 음악은 스웨덴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 루드비히 고란손이 맡았다. 차일디시 감비노(Childish Gambino), 찬스 더 래퍼(Chance the Rapper),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 등 힙합 및 록 음악 프로듀싱을 맡은 이력이 있는 그는 영화 <블랙 팬서>를 통해 아카데미에서 영화 음악상을 수상했고, <오펜하이머> 영화 음악을 통해 두 번째로 같은 상을 받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테넷>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오펜하이머>에서는, 실존했던 인물이며 주제가 무거운 만큼, 웅장하면서도 심플하고 흥미진진한 사운드 연출을 선보인다.


닐스 보어가 젊은 물리학도 오펜하이머에게 묻는다. ‘대수학은 팝송 악보 같은 거야. 음악만 들을 줄 알면 악보는 못 봐도 돼. 음악 들을 줄 아나, 로버트?’, ‘네, 들을 수 있어요' 존경해 마지않는 보어의 조언에 압도된 듯한 오펜하이머의 대답. 뒤이어 마치 Can you hear the music의 유일한 뮤직 클립인 듯 독립적이고 몽환적인 몽타주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가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심도 있게 다룬 만큼 음악도 그의 감정을 그려내는 데 효과적이어야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주문한 것은 바이올린의 사용이었다. 프랫이 없는 바이올린은 감정의 변화를 아주 빠르게 전환하여 묘사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악기였다. 그의 아내 세레나가 바이올리니스트였기 때문에 이 곡의 녹음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6개 음을 활용한 헥사토닉 스케일의 멜로디는 영화의 라이트모티프가 되어 여러 번 나타난다. 무려 21번이나 되는 템포 체인지와 급속히 전개되는 속도감으로 애초에 라이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작곡가에게 그 실현 가능성을 귀띔한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였다고 한다. 이 작업을 위해 팀이 된 부부는 라이브 녹음을 위한 기술적 방안을 모색했고, 연주자들에게 템포 트랙을 들려주는 헤드폰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결국 불가능해 보였던 라이브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의 테마곡에는 피아노와 첼로가 쓰이며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맷 데이먼(Matt Damon)이 연기한 그로브스의 주제곡 또한 서정적인 분위기로 흐른다. 인터뷰에 따르면 작곡가는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의 관계를 전생부터 이어져 온 깊은 우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느꼈다고 한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농도 짙은 조크를 주고받는 장면, 그들의 대화 속에서 어느새 싹터 있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발견했다면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법하다. 둘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 이 곡의 배경에 놓여 왠지 모를 슬픔과 아이러니, 그리고 연대감으로 빚어진 온기를 자아내는 것 같다.


무심결에 사운드트랙을 듣다가 문득 느낄게 될지 모르지만 여기에선 드럼 사용이 지양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군사적 뉘앙스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대안으로 사용된 것이 발을 구르는 소리, 기계적으로 똑딱이는 소리, 금속에 부딪치는 소리 등 악기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얻는 충돌의 소리들이었다. 내면의 혼돈과 함께 삶의 어느 한 시기 참혹한 비통함을 통과해야 했던 물리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첼로의 콜 레뇨 주법 또한 핵반응 시퀀스에 효과적으로 도입되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사용한 IMAX 65mm 흑백 카메라는 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는데, 그와 같은 장인적이며 창의적인 접근이 음악에서도 충분히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다.



https://youtu.be/fWvX4M1dXss?si=5s9NwxQ-NxZgr109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Barbie the Album / Various Artists

Honey / Caribou

Two Star and the Dream Police / Mk.g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