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Soundtrack / Matija Strniša



1990년대를 묘사할 때 영화는 그 시절이 가지는 고유한 향기를 동반하는 것 같다. 다가올 밀레니엄의 기대와 불안 아래에서 격변이 현실로 일어나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X세대, 오렌지족, PC 통신, 서태지와 아이들 등 90년대에 상징적으로 떠올랐던 문화는 7-80년대와도 구분되고 2000년대와도 차별화되는 특성을 보이는 것 같다. 90년대는 ‘삐삐'의 시대이기도 하다. 삐삐의 액정 화면에 뜬 숫자로 상대방의 뜻을 해독하고 음성 메시지를 듣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던 시절. 영화에서 삐삐가 스토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장면은 없었지만 문득 sns 없이 소통하던 시절을 돌아 보니 사람 대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생생하게 이루어지고 구두적 약속에 더 신중해지며 그리움도 커져 감성적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풍부하지 않았는지 묻게 된다. 영화는 바로 그 시절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벌새>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제법 다양해 보인다. 90년대 서울의 모습, 교육 환경, 가정 내의 불화,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인권 유린과 억압, 소녀의 사춘기, 여성이 여성과 교류하는 양상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등 여러 가지 복합성을 띠는 주제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그려졌는데 그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부분은 가족의 모습이었다. 은희네 가족은 겉보기엔 무척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바람 잘 날이 없다. 수희와 은희가 나란히 누워 ‘우리 집은 콩가루 집안’이라 말하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 다 따로 살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은희의 아빠는 가부장 캐릭터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는 자기만의 취미가 있고, 가족들 앞에서 늘 호통치는 것 같은데 막내딸의 병원행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의사로부터 수술 후유증에 관한 설명을 듣고는 불현듯 딸을 걱정하며 눈물을 터뜨리기도 하는 등 낭만성을 간직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다. 모순점을 가진 캐릭터라기보다는 오히려 가부장 역할이야말로 허상인 듯 느껴지는 측면이 더 강했다. 저마다 각자의 일과 학업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가족들 중 누구도 은희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것 같지 않지만 그들은 결코 은희에게 무심하지 않다. 다만 이들에게 다정한 표현이 성립할 수 없을 뿐이다. 그게 바로 1994년의 서울, 그리고 한국의 모습이라는 사실에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대치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중학생 은희의 주변에는 밝고 희망적이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단지 스스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적당히 놀 거리를 찾을 줄 아는 자발성이 은희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할 뿐이다. 생각해 보면 나의 성장기 풍경도 은희네나 그 주변과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때 내 주변에도 밝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따금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이질감부터 들어 그의 사고방식을 부정하게 되거나 그의 가치관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런 환경 속에서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숨 쉴 수 있는 것들이 있었으니 현실의 압박에 반해 반사적으로 누리는 즐거움은 실제보다 더 비대했을 것이다. 그 시절 내가 마주한 세상은 온통 부정의 필터를 쓰고 조금 다른 종류의 공기가 유입되어도 제대로 섞이지 못하고,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한 것들로만 채워진 새장과 다름없었던 것 같다. 나 또한 가정과 학교 밖에서, 간혹 영지 선생님 같은 아우라를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그럴 때면 즉시 그를 동경하고 싶어졌다.

은희네 가족들은 늘 식탁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수희를 혼내던 아빠가 갑자기 비난의 화살을 엄마에게로 돌리자 그제야 엄마도 참았던 화를 쏟아내며 맞받아친다. 누군가 피를 흘리거나 두들겨 맞아도 은희네 가족은 늘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한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이나 눈을 바라보지 않지만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모여 서로가 나누는 반찬들에 시선을 두고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식탁은 가족을 내부로, 서로에게로 끌어당기는 강한 자성을 발휘하는 공간으로 그려져 있었다. 묵인과 억압, 불화의 울퉁불퉁한 리듬을 따라가며 화합을 이끌어내던 불가능한 공간이었다.


영화 음악을 맡은 마티아 스턴이샤는 슬로베니아에서 자라고 클라리넷을 전공한 뒤 활동 거처를 베를린으로 옮겨 전자 음악 작곡을 보다 심화적으로 공부했다. 이 사운드트랙에서 김보라 감독은 전자 음악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클래시컬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기를 원했고, 뮤지션은 그러한 주문에 걸맞은 스코어 음악들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 느리고 여백이 많은 선율을 중심으로 잔향감이 부드럽게 포개어지는, 때론 두터운 윤곽을 그리는 사운드가 스토리나 영화의 이미지들과 효과적으로 결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에 밝고 긍정적인 캐릭터가 없었던 것처럼 음악들도 대부분 일관된 심플함 속에서 조용하고 아득한 풍경을 자아내는 데 그치는 기분이다. 유독 First Kiss만이 발랄함과 순수를 드러내고 있다. 칠아웃 무드의 잔잔한 비트를 베이스로 선명하게 리듬부를 제시하며 다른 곡들과 차별화되고, 사운드트랙의 전반적 분위기에 확실한 명암을 부여하는 트랙이었다.



Oolong Tea는 영지와 은희의 테마 곡으로 기억된다. 영지 선생님이 대접한 우롱차를 마시며 은희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순간, 오빠의 폭력이 어떤 식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체념하듯 담담하기만 한 은희를 바라보며 영지는 어떤 말도 쉽게 건네지 못한다. 그녀의 말은 시간이 지나서야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막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서 회복 중인 은희를 찾아온 영지는 은희에게 이제는 맞지 말라고 말한다. 어린 은희를 다독이며 그녀가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이 곡은 사운드트랙에 나타난 여러 변주의 주요 선율을 공유하는 트랙이기도 하다. 음과 음 사이의 아득하고 희미한 거리처럼 같은 자리에 머물던 영지와 은희의 거리를 상기시켰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주고받는 에너지들과 베일을 벗지 않은 영지의 삶에 대해, 그리고 은희에게 벌어진 몇 가지 답답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음미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 이 짧은 곡은 차를 위해, 차가 우러나는 시간을 위해,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을 위해, 그리고 그녀들을 위해 그곳에 놓여 있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은희는 베란다에 앉아 영지의 편지를 읽는다. 이윽고 은희는 수학여행 날 아침을 맞이한다. 보이스오버로 들려오는 영지의 목소리와 함께 카메라는 한껏 들뜬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포착한다. 마치 운동장의 모든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영지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되새긴다. Everyone Is Here라는 마지막 곡은 도약을 내재하고 있다. 지금껏 은희가 맺은 1대 1의 다양한 관계를 그려내는 데 포커스를 맞추던 영화도 이제 관객들에게 더 큰 그림을 보도록 이끈다. 모두 이곳에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고 헤어진 바로 이곳에 모두가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문득 불어온 바람처럼 부드럽게 알려준다. 영화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이 메시지는 우리가 스스로를 결코 구해내지 못할 일들에 관해 위로를 건네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주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이 배경이었던 영화와는 달리 음악에는 그 어떤 고정된 이미지나 실체가 들어 있지 않다. 우리는 영화의 사연을 통해 우리 삶을 반추하고 음악을 통해 경험과 감정을 확장하게 된다. 단지 아주 작은 벌새처럼, 키 작은 아이 은희의 좌절, 분노, 체념, 사랑, 성장을 차분하고 세심히 그려낸 영화의 정성과 더불어, 음악도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오묘하고 영롱한 빛깔의 소리들을 얻기 위해 영화와 세심히 관계 맺은 흔적을 남겼다. 그 시절과 지금을 이어줬던 건, 그 시절 서울과 다른 수많은 도시들을 이어줬던 건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음악의 다리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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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emes of the movie were quite diverse; The circumstances of Seoul in the 1990s, the educational environment, family discord, girls’ adolescence, the way women interact with other women, and the tragedy of the Seongsu Bridge collapse, and so on. They were all closely connected and depicted exquisitely, but the most impressive part to me was the rendering of the family. Eun-hee’s family looks very ordinary, but when you look inside, you get to know there's no peaceful days. I think as a Korean, who also spent teen years in Korea in the 1990s, the movie showed me a lot of things to sympathize with. (To be honest, I wanted to write this kind of autobiographical story during my college days.)

Matija Strniša, who was in charge of the score, grew up and studied clarinet in Slovenia, later moved to Berlin. The sound, which gently wraps by the reverberation and sometimes draws a thick outline, centered on a slow and spacious melody, seems to have effectively combined with the story and the images of the movie. Just as there were none of hopeful and positive characters in the movie, most of the scores seem to pursue at creating quiet and distant scenery with consistent simplicity. Only First Kiss had liveliness and purity. A chill-out mood track, this short song has a clear rhythm department based on the tender beat. So, it makes a contrast to the overall atmosphere of the soundtrack.

Oolong Tea is remembered as the theme song of Yeong-ji and Eun-hee. It is also a track that shares the main melody of many variations appearing on the soundtrack. The song was for tea, for brewing minutes, for the scene where one opened up her mind, and for the girls.

The last song, Everyone Is Here, implies a leap. The movie, which has focused on depicting the various one-on-one relationships that Eun-hee has had in the meantime, now leads the audience to see the bigger picture. Everyone is here. So, it gently informs us, like a sudden breeze, that we are all together in this very place where we met and parted. And the message feels like a kind of solace about what we never save ourselves from.

Unlike movies that are set in very specific places and times, music does not contain any fixed images or entities. We reflect on our lives through the story of the movie and expand our experiences and emotions through the music. Eun-hee, who is no other than a very little hummingbird, goes through her share of frustration, anger, renunciation, love, relationship, and growth that were portrayed by the sincerity of the movie. The music also leaves traces of careful involvement to create mysterious and crystal toned sounds. Maybe because of a bridge of music that would never disappear until the world ended, this story could connect that time and now, and Seoul and other c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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