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il Does Not Exist(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Soundtrack / Eiko Ishibashi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최근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수행한다고 할 만큼 군더더기 없는 영화세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단순한 스토리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사슴이 서식하는 한적한 시골 마을 하라사와에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가 둘이서 살아가고 있다. 조용하던 마을에 글램핑장을 설립하고자 하는 한 업체가 나타나고, 머지않아 마을에서 설명회가 열린다. ‘플레이모드' 직원들은 정부의 보조금을 노린 술수를 숨긴 채 그저 형식적 절차에 임하듯 허술한 사업 계획을 발표하는데, 마을 주민들은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시행 계획을 수정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이 설명회 시퀀스가 영화에 그려진 가장 표면적인 충돌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주민들과 글램핑장 설립 계획의 충돌은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시골과 도시의 대립, 상업과 탈 상업적 가치의 대립으로 읽히기도 한다. 마을의 대표적 상업 공간인 식당조차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하라사와 물의 신선도에 경도된 미네무라 부부가 도쿄에서 이주하여 시작된 가게로, 영화는 아내 사치가 정성 어린 태도로 우동을 만들어내는 장면도 담아낸다. 영화는 비록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비트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닐지라도,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몽매함을 냉소하거나 헐뜯고 있다. ‘자본의 논리'로는 결코 개입할 수 없고 참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온전히 자연의 생명력으로 움직이는 오지 마을 하라사와의 무대 위에서 말이다.


설명회에서의 충돌이 영화에서 일어난 첫 번째 큰 사건이라면, 두 번째로 큰 사건은 결말부에서 일어난다. 두 번째 사건은 첫 번째와는 다르게 미스터리하고 무자비해 관객을 충분히 혼란에 빠트린다. 타쿠미는 건망증이 있는데 종종 하나를 픽업하러 가는 시간을 잊어버린다. 타쿠미의 건망증은 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엄마가 부재하는 가정에서 치명적인 사건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기에 실은 매우 심각한 병이다. ‘플레이모드' 직원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다시 찾아온 날도 타쿠미는 하나를 픽업하러 가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 하나는 행방불명된다. 마을 주민들이 나서 해가 지기 시작한 숲을 수색하지만 하나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마침내 하나를 발견한다. 하나는 사냥꾼의 총에 맞은 사슴을 바라보고 있다. 하나가 모자를 벗어 들고 사슴에게 다가가려 하자 타카하시가 나서려고 한다. 이때 뜻밖에도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제지하며 결국 그의 목을 졸라 목숨을 잃게 만든다. 타카하시가 쓰러진 뒤 타쿠미는 눈밭에 누워 있는 하나에게로 달려간다. 아이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고 사슴의 습격을 당한 흔적으로 여겨지는 코피를 흘리고 있다. 타쿠미는 하나의 코에 손가락을 대 숨을 쉬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하나를 안고 그 장소를 떠난다. 엔딩은 영화의 오프닝과 북엔드 형식으로 연결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트래킹 쇼트의 밤 버전으로 바뀌어 있고, 타쿠미의 것으로 짐작되는 거친 숨소리를 담는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이 결말부가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비록 타카하시가 처음 등장하던 글램핑장 설명회 때 전형적인 속물 타입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다고 해도, 도쿄에서 하라사와로 장거리 드라이브를 하며 마유즈미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가 꽤 인간적이며 보편적인 성인 남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고, 비즈니스를 떠나 인간적으로 마을에 동화되어 가는 듯한 모습도 보게 되었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마을을 다시 찾아왔을 때, 타카하시는 타쿠미에게 나무를 베어 보고 싶다고 하거나 베고 난 다음 그 쾌감에 대해 어필하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트리기도 하면서 점차 우리에게 친숙한 유형의 인물로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관객인 나는 한 인간으로서 처음에 타카하시를 악당의 분신처럼 여기다가 그가 진솔한 내면을 내비치자, 혹은 대화를 통해 자신에 대해 드러낼수록 그에 대한 불쾌감이나 경계심을 해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인 내가 인간으로서 인물의 변화나 속내에 동요하든 말든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향해 직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처음에 내가 느꼈던 결말에 대한 당혹감은 결국 한순간 저만치 멀어져 버린 영화와 나 사이의 거리에 대한 싸늘한 인식이기도 했다.
타쿠미는 자신을 마을의 심부름센터라 소개한다. 타쿠미의 살인은 ‘자연의 심부름꾼'이 이곳 질서를 모른 채 무법자처럼 날뛰는 ‘자본주의의 심부름꾼’을 제거한 일로 일차적으로 읽을 수 있다. 타쿠미는 글램핑 같은 조잡한 조어와 상술의 탈을 쓴 외부인 그 누구도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게끔 무시무시한 사건을 만들어버린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음악을 맡았던 에이코 이시바시가 이 영화에서도 음악 작업을 했다. 전작에 이어 짐 오루크(Jim O’Rouke)가 믹싱과 마스터링, 그리고 기타 연주를 맡았다. 나로서는 전작과의 일관성이나 심화된 정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컸다. 도시적 앰비언스가 짙게 배어 있던 <드라이브 마이 카> 사운드트랙에 비하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화가 지니고 있는 차가운 온도를 고스란히 담아낸 듯 빈틈없이 냉혹한 분위기나 때론 괴기스러운 풍경을 그려낸다. 건반과 심벌즈 소리의 잔잔한 하모니가 중심이 되었던 <드라이브 마이 카>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현악기가 주도적으로 쓰이며 굵고 투박한 선율이나 음형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변화했다.
한 가지 특징적이라 느꼈던 부분은 영화에서 음악이 흐르다가 장면이 바뀔 때 별다른 예고도 없이 뚝 끊어지는 순간들이었다. 예를 들면 오프닝 신에서 카메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비추다가 그루터기에 올라 선 하나가 등장할 때 흐르던 음악 Evil Does Not Exist를 돌연 끊어버린다. 그리고 잠든 하나의 꿈 속인 듯한 낮의 장면을 보여주다가 다시 잠이 든 하나를 보여줄 때도. Deer Blood가 흘러나오던 장면인, 타쿠미와 타카하시, 마유즈미가 하나를 찾아 숲을 헤매는 신에서는 장면 전환도 없이 음악이 끊어져 버린다. 음악을 이렇게 편집하는 방식 또한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시선을 반영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타쿠미가 나무토막을 쪼갤 때 도끼로 한 번에 툭 내리치는 순간처럼, 인간의 작위적인 개입을 함축하는 일이기도 했다.


건망증으로 하나의 픽업 시간을 놓친 타쿠미가 뒤늦게 학교에 도착하자 선생님이 하나가 먼저 떠났다고 말한다. 타쿠미는 숲으로 향한다. 혼자 나무 사이를 걷던 그는 어느 순간 하나를 등에 업고 나타난다. 하나와 숲을 산책하면서 나무 이름을 알려주거나 사슴이 물을 먹는 장소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그의 모습은 자상한 아버지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며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그가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은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따스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꿩의 깃털을 발견할 때 흘러나오던 음악 Fether는 타쿠미의 집 거실에 놓인, 하나의 엄마와의 개연성을 상징하는 물품인 듯 놓인 피아노를 충분히 연상시키는 다소 낭만적인 선율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피아노의 진행과 함께 도저히 그 속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산발적이고 원시적인 종소리가 더해져 청자가 낭만적이거나 회고적으로 빠져드는 일에 훼방을 놓는 기분이다.
부상을 입은 마유즈미가 홀로 남아 어둠이 내린 숲을 바라볼 때 흘러나오던 행방불명 방송은 Missing V.2의 도입부가 된다. 영화와 영화 바깥의 음악을 매우 자연스럽게 잇는데,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흐르던 음악을 끊어버리던 앞선 방식에 비하면 믿기지 않는 연결인 셈이다. 마유즈미가 나무로 된 집에서 나무로 빼곡한 숲을 바라보던 장면 속에 의혹과 기다림, 미스터리가 뒤섞여 있었다. Evil Does Not Exist는 영화에는 그려지지 않은 타쿠미의 슬픔을 어둠 속에서 극한으로 몰고 가는 보이지 않는 운반자처럼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외침을 토해 내어도 도무지 응답이 없는 자연. 이를테면 자연은 살아 숨 쉬는 죽음 같다. 자연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근원임을 이 영화는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악에 관한 이야기일까, 사슴에 관한 이야기일까,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붕괴시키고자 한 연출적 시도일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감독의 관점은 타쿠미를 자연과 가장 가까운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형 제목을 제시하면서 타쿠미의 범죄가 악으로 읽히지 않게끔 유도한 의도 또한 분명히 주어진다. 나무를 베고 나무로 지어진 집에 살고 가게를 위해 물을 길어다 주고 홀로 자식을 돌보며 때때로 연필로 스케치를 하는 그는 속내를 털어놓거나 타인과 관계 맺는 경우가 없다. 영화가 품고 있던 모든 질문을 내려놓고 내게 가장 깊이 남았던 인상은, 그가 철저히 고독한 인간이며 이 영화를 보는 일이 그의 고독을 응시하는 고통도 동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타쿠미는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걸까, 아니면 영화가 단지 자신의 고독에 이력이 나버린 뒤의 타쿠미를 조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가 종종 취하던, 우리가 어릴 때 흔히 해본 적이 있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멀어지는 지나온 길을 고집스레 보여주는 쇼트를 통해서 가만히 유추해 볼 뿐이다. 비록 수수께끼 같지만 그 시선은 감독이 이 영화에서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자 했는지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만 같았다.
인간은 사랑과 미움 등 감정에 곧잘 휩쓸리며 때로는 무너지지만 때로는 기적적으로 일어서는 괴력을 지닌 독특한 종족이다. 무심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역설적이게도 인간만의 열정과 탐구심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자연을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은 사랑과 미움 등 감정에 곧잘 휩쓸리며 때로는 무너지지만 때로는 기적적으로 일어서는 괴력을 지닌 독특한 종족이다. 무심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역설적이게도 인간만의 열정과 탐구심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자연을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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