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p Fiction Soundtrack / Various Artists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감독의 두 번째 작품 <펄프 픽션>은 1994년 발표된 문제작이었다. 범죄, 폭력, 잔혹함, 신성모독 등의 키워드들을 특유의 위트로 엮은 B급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로 이미 영화계를 강타한 뒤였다. 보석상 절도를 위해 모인 갱단의 이야기를 그린 데뷔작과 달리, <펄프 픽션>은 지하세계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주요 인물들은 범죄에 깊이 연루되어 있지만 말이다. <펄프 픽션>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인물들을 각각의 이야기에 서로 다른 무게로 등장시키며 별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남다른 작풍을 선보였다. 데뷔 전 비디오 대여점에서 일하며 영화를 보고 독학으로 배운 감독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의 영화들은 자기만의 아카데미를 수료한 듯 언뜻 무질서해 보이고 위풍당당하면서도 공손하게 과거의 유산들을 적절히 오마주해 시네필들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도 좋았다. <펄프 픽션>에서 특별히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대화 신들이었는데, 비록 허풍이나 쓸데없는 잡담들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매번 실감 나고 밀도 있게 쓰여 있는 점에서였다. 이와 같은 대화 장면들은 영화의 분위기를 일관되게 끌고 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었다.
위키에 실린 감독의 인터뷰 내용들 중에서, 그가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영화에서의 뮤지컬 장면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용을 읽었다. 고다르의 작품들 속에 뮤지컬 장면이 뜬금없이 나오는데 그것들이 중독성 강하며 친근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뮤지컬을 도입하며 영화를 중단시키던 거장의 방식이 뭔가 영화와 감독에 대해 더 큰 애정을 갖도록 만든다는 이야기를 한다. 미아와 빈센트의 트위스트 콘테스트 장면이 바로 이런 오마주 정신과 결합해 만들어졌다. 손끝 하나 건드려선 안되는 보스의 여인 미아와 빈센트의 데이트는 아슬아슬함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느슨했지만 에로스나 비극을 대신해 그 자리에 있던 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빈센트가 미아에 대해 가지는 순수한 마음일 수도, 타란티노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가진 순수한 마음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지 내가 하얀 밀크쉐이크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이와 같은 과장된 표현을 불러일으킬 만큼 풍부한 영감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몸짓의 언어로서 서로 박자를 맞추고 서로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이 아닌 것을 나누고 함께 호흡하는 춤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잠시 숙고하도록 했다. ‘익숙하고 오래된 스토리를 가져와 엉뚱한 곳으로 흐르게 둔’다는 타란티노 감독의 개성적인 작법과 그 취향에 따라 미아와 빈센트의 저녁은 결국 다 망쳐버린 처절한 데이트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잭 래빗 슬림스에서 보낸 댄스 타임만큼은 기막히게 맛있는 5달러짜리 쉐이크처럼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타란티노 감독이 총괄 사운드트랙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엔터테인먼트적 면모를 더욱 연장한다. 수록곡들은 감독이 친분을 갖고 있던 뮤지션 동료들의 추천 곡들을 통합해 골라낸 에센셜 트랙들로 채워졌다. 락앤롤, 솔, 알앤비, 서프 뮤직 등의 장르들을 뒤섞은 이 음악 컬렉션을 플레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분위기를 이색적으로 가공하거나 단순히 업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전반적으로 알앤비와 솔 트랙들이 많아 릴랙스 무드와 흥겨운 분위기, 유연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영화 속 대화들을 발췌해 충분히 영화를 되새겨주기도 한다. 빈센트와 줄스가 차를 타고 이동하는 첫 장면에서 빈센트가 ‘파리에선 쿼터파운더 치즈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하고 묻는다. 그곳엔 미터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쿼터파운더’의 개념을 모른다며 ‘루아얄 위드 치즈’라 부른다 한다. ‘빅맥은?’, ‘르 빅맥’ 하며 두 사람이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이 장면 속엔 영화가 가진 수많은 특성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사소한 차이들을 설명하는 언뜻 실없어 보이는 대화지만, 이 대화뿐만 아니라 여러 장면들을 통해 다소 불행하고 덜떨어져 보이는 빈센트와 줄스라는 인물이 실은 상당한 비평적 식견을 갖고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Personality Goes a Long Way 대화 조각 또한 비슷한 분위기로 이해할 수 있다.


Let’s Stay Together은 마르셀러스와 부치가 딜을 하던 바에서 흘러나오며 난데없이 슈트 차림에서 반바지와 반팔 티를 입은 빈센트와 줄스의 등장에도 배경이 된다. 다시 말해 이 곡은 “빈센트 베가와 마르셀러스 월러스의 부인” 챕터의 테마곡이나 도입인 셈이다. 이 장면의 연출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화면에서 마르셀러스는 얼굴도 나오지 않고 그의 흑인 다운 말투의 목소리만 흘러나오고 카메라는 단지 얼어붙은 듯, 혹은 원래 표정이 없는 사람인 듯한 부치의 미동 없는 상반신을 담아낼 뿐이다. 알 그린(Al Green)의 이 유명한 곡은 1971년 발표되어 빌보드 핫 100에서 1위에 오른 솔 발라드로, 온건한 미드 템포의 부드럽고 담백한 오래도록 널리 사랑받은 러브 송이다. 이 러브 송이 이후 일어날 미아와 빈센트의 데이트를 암시한다고 생각하면, 마르셀러스와 빈센트가 동시에 등장하는 이 신은 실은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인 셈이다.
이 사운드트랙에는 보컬 없는 서프 트랙들이 많이 실려 있다. The Tornadoes의 Bustin’s Surfboards와 오프닝에 쓰였던 Misirlou, The Centurions의 Bullwinkle Part II, The Revels의 Comanche, The Lively Ones의 Surf Rider가 그것들이다. 서프 장르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중반까지 큰 인기를 얻었고, 나로서는 서프 음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인 관계로, 비치 보이스가 록과 팝 지향의 보컬 서프 장르에서 유명세를 얻기 전 이 장르의 기반을 구축한 에센셜 트랙들을 만나볼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Misirlou는 동지중해에서 1920년대부터 연주되어 오던 작자 미상의 오래된 포크 송으로, 현대에 이르러 여러 음악가들에 의해 녹음과 연주가 이루어졌는데, 그중 여기에 수록된 딕 데일(Dick Dale)의 서프 버전은 현란한 록 기타로 리드하면서 원곡이 가진 오리엔탈한 분위기를 서구적으로 재해석하여 들려주고 있다. 다소 전투적인 박력이 있어 오프닝의 레스토랑 강도 습격 신에 잘 어울렸고,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의 성격을 압축하여 드러내는 듯한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엘피의 사이드 투는 잭 래빗 슬림스의 트위스트 콘테스트 무대로 시작된다. 미아와 빈센트가 카리스마 있는 그들의 춤을 출 때 흘러나오던 척 베리(Chuck Berry)의 You Never Can Tell. 이 곡의 가사는 십 대 연인의 결혼식 이후 일상을 흥겨운 리듬 속에 스케치하듯 묘사하고 있고, “그게 바로 인생”이라고, 어른들은 말하지, 넌 결코 그것을 알 수 없다고(“C'est la vie", say the old folks, it goes to show you never can tell)라는 코러스를 반복한다. 귀가 후 미아가 플레이하는 노래 Girl, You’ll be a Woman Soon–록 밴드 Urge Overkill 버전–은 사랑하는 여인이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을 담은 노래다. 빈센트와 미아의 에피소드에서 유난히 눈길을 끈 위의 두 곡은 미성숙한 태도, 어설픈 사랑과 관계 등을 주제로 삼고 있는 곡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들은 결국 미아의 캐릭터에 더 입체감을 부여하고, 영화의 분위기도 한층 무르익도록 만들었다.
<펄프 픽션>은 영화의 오프닝에 타이틀 ‘pulp’의 사전적 정의를 표기하며 대놓고 저속하고자 하는 태도로 돌파해나간 신예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결과물이었다. 만화책 넘겨 보듯 재미있으면서도 영화적인 완성도나 실험성, 혁신성, 개성이 남다른 작품이었다. 사운드트랙이 오래도록 영화음악 에센셜로 남아 있는 것도 음악 선정에 있어 탁월한 센스가 뒷받침했기에 누리는 영광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또한 감독의 긴밀한 협력과 입김이 많이 묻어나는 점도 이 사운드트랙이 지닌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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