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I Left You / The Avalanches
애벌랜치스의 데뷔 앨범 <Since I Left You>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나온 앨범이지만, 음악팬이라면 한 번쯤 돌아보기 좋은 목록 중 하나다. 플런더포닉스(Plunderphonics)의 대표작이기 때문인데, 플런더포닉스는 기존에 있는 노래들을 샘플로 사용해 새로운 곡을 창작하는 방식을 말한다. ‘Plunder’, ‘약탈’을 의미하는 이름이 넌지시 알려주는 것처럼, 이 양식은 ‘샘플링’에서 제법 무례하고 무심한 태도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샘플들의 다중적이고 창의적인 배열을 하나의 미학으로 취한 혁신적 음악 어법이었다. 3000여 개로 추정되는 소스들이 촘촘하게 배열된, 그러니까 오직 샘플만으로 구성된 노래들을 수록한 <Since I Left You>는 2000년 공개 이후 서구권을 중심으로 비평적 찬사를 받아 왔다.
샘플 기반이라고 하니,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앨범들이 있었다. 바로 Beastie Boys의 <Paul’s Boutique>다. (https://sj-in-musicnote.tumblr.com/post/656836692287832065/pauls-boutique-beastie-boys) 비슷한 성격의 앨범을 힙합에서 찾을 수 있다. Dj Shadow의 <Endtroducing>과 J Dilla의 <Donuts>, 또 Oneohtrix Point Never의 <Replica>도 여기에 해당한다. ‘플런더포닉스’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한 캐나다 뮤지션 존 오스월드(John Oswald)는 80년대 후반 플런더포닉스로 된 EP를 출시했고,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약간의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시디를 레코드점에서 팔지 않고, 라디오에서 틀도록 하면서 청취자들이 개별적으로 녹음해 해당 앨범을 소장하기를 유도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법망(?)’을 교묘히 피해 갔지만, 결국 뮤지션은 캐나다의 레코드 산업 협회(CRIA)로부터 마스터 시디를 파기할 것을 요청받았다. 존 오스월드는 플런더포닉이란 ‘소리적 인용’이라 정의했지만, 음악계–특히 협회–에는 이것이 과연 정당한 창작물로 용인될 수 있는지에 대한 까다로운 질문을 남기는 일이었다.
플런더포닉스는 작업 방식의 특성상 창작자의 꽤 리버럴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 같다. 당시 6명이던 애벌랜치스 멤버들은 값싼 샘플러와 믹서 등의 장비들과 중고품 엘피들을 뒤져 그들만의 음악적 콜라주를 밀레니엄에 걸맞은 새로운 감수성으로 탄생시켰다. 그룹이 추구했던 사운드는 당시 우세하던 드럼과 베이스의 강화로 잘 다듬어진 윤이 나는 댄스 튠이 아니라 60년대의 낭만적 분위기를 자신들의 빈티지 장비들을 통해 출력해 내는 것에 가까웠다. 여러 밴드명을 거치다 결국 The Avalanches로 낙점된 것도, 단 한 장의 앨범 <Ski Surfin with the Avalanches>를 남긴,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의 서프 록 그룹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뭐랄까, <Since I Left You>는 형성 초기에 펑크 밴드로 활약했던 이력에서 눈치챌 수 있듯, 그룹의 저돌적이고 확고한 성향이 묻어나면서도, 동시에 매우 학구적인 태도로 임했다고 볼 수 있는 이들의 데뷔 앨범이었다.
서막을 여는 타이틀곡 Since I Left You는 마치 시티팝 같은 감미로운 선율로 진행된다. 여러 사운드와 영화의 대화 조각들을 엮어 만들었다는 사실이 크게 부각되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연출과 높은 정밀성을 보여준다. 곡이 가진 최소한의 서사를 파악해 본다면, 이 곡은 이방인인 화자에게 현지인이 건네는‘Welcome to paradise’라는 상냥한 첫인사로 시작되고, ‘Since I left you(당신을 떠난 이후로) / I found the world so new(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어)’라며 결별 후를 낙관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The Main Attraction의 원곡 Everyday의 ‘Since I met you’를 ‘Since I left you’로 바꾼 것은 장르의 기발함과 함께 그룹의 위트를 잘 드러낸 장점으로 이해된다. 미스트처럼 약간의 몽롱함이 뿌려져 있지만 무언가 여기에 쉽게 동요될 수 있을 것 같은, 크게 벽이 없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다.
네 번째 트랙 Two Hearts in ¾ Time을 들어 보면, 그야말로 ‘약탈’의 정신이 제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른 곡들에도 영화의 대화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에 사용된 사운드트랙이 눈길을 끌었다. 1972년 뮤지컬 영화 <Cabaret>인데, 이 사운드트랙의 몇 가지 트랙들을 조합해 위의 곡에서 하나의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있었다. 솔 싱어 마를리나 쇼(Marlena Shaw)의 느긋한 허밍으로 벌스를 채우기도 한다. Avalanche Rock과 Flight Tonight에서 프리스타일 랩, 세서미 스트리트 등 표본 같은 대중문화의 산물들이 샘플을 주도하며 힙합 분위기로 전환되기도 한다. Tonight의 경우 건반 패턴의 다층적 나열을 통해 뉴에이지풍 사운드를 선보인다. 제법 다양한, 거의 뉘앙스에 가까운 장르적 전환도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샘플의 장르적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가변성이 있는 것 같았다.
턴테이블을 긁는 스크래칭이 선명한 각인을 남기는 Frontier Psychiatrist는 앨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 중 하나다. 코미디 듀오 웨인과 셔스터(Wayne and Shuster)의 과거 녹음 중 일부를 메인 소스로 사용하고, <폴리에스터(Polyester)>라는 1981년 영화의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 불안정한 상태를 가진 소년에 관한 줄거리를 구성했다. 후반부에는 어린이용 동화 구연 오디오 샘플을 배열하면서 분위기를 다소 전환시키며 끝을 맺는데, 정교하면서도 즉흥성이 느껴지는 연출이었다.
<Since I Left You>는 ‘노래를 만드는 방식’을 변화시킨 것은 물론, ‘노래를 듣는 방식’ 또한 변화시켰다. 이 앨범을 감상하려면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나 문장들, 사운드 이펙트 등의 조각들을 개별적으로 음미할 수도 있지만, 하나의 덩어리로서 전반적인 분위기를 음미하는 것도 가능하다. 샘플 정보 사이트 WhoSampled에서 원곡들을 직접 찾아보는 의욕적 마인드의 확장적인 청취도 물론 가능하다. 이 앨범에 사용된 샘플들의 목록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해도 워낙 파편적으로 사용되고 피치나 템포도 변경되었기 때문에 원곡이나 소스를 알아본다는 것이 이 앨범을 감상하는 데 있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서, 실험과 안정성 사이에서 이따금 어려운 질문에 부딪치는 상황과 마찬가지로 애벌랜치스 멤버들에게 ‘샘플만으로’라는 제약을 뛰어넘어야 할 상황들이 분명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 결과물인 <Since I Left You>에서 그들은 청자들이 자신들이 만든 새 지도를 보며 익숙한 듯 새롭게 느껴지는 길과 장소들을 잠시나마 유유자적하게 탐험해 보도록 이끈다.

-참조
https://thevinylfactory.com/features/the-avalanches-since-i-left-you/
https://www.tastemakersmag.com/features/plunderphonics
https://www.plunderphonics.com/xhtml/xnegation.html
https://www.whosampled.com/The-Avalanches/Since-I-Left-You/
https://www.plunderphonics.com/xhtml/xnegation.html
https://www.whosampled.com/The-Avalanches/Since-I-Left-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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