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or / Tyler, The Creator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를 단순히 힙합 뮤지션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얼터너티브 힙합 컬렉티브 Odd Future 시절부터 그는 다방면의 재능을 뽐내기 시작했다. 자신과 다른 멤버들의 곡을 프로듀싱하고, 스케치 코미디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하거나 멤버들과 공동으로 연출을 맡기도 했다. 자신의 패션 브랜드 ‘골프 왕(Golf Wang)’을 론칭한 뒤로 유서 깊은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컬렉션에도 참여하게 된다.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Virgil Abloh)가 루이비통의 최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예술 감독이 된 이후,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고, 2024년 남성복 컬렉션을 타일러와 협업해 진행한 것이다. 타일러의 루이비통과의 인연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2022년에는 패션쇼의 음악 디렉터로 참여해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한다.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살아가던 유년 시절의 그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학창 시절 발을 들인 드라마 클래스, 밴드 클래스에서는 여러 이유로 인해 쫓겨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한다. 어린 시절의 ‘센 척’이라 해도 충분히 반감이 일어날 수 있는 발언들이 인터넷에선 끝없이 회자된다. 초기 앨범의 가사에 담긴 파격적이고 수위 높은 내용들로 인해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로부터 방문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까칠한 성미로 일부 동료 뮤지션들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일부러 트러블을 만들고 다니는 것 같은 악동의 이미지와 함께 뮤지션으로서 자리해 간 것이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행보에서 눈에 띄는 이점은, 좌절되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찾아 계속해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다듬어 간 부분일 것이다. 2009년 데뷔 앨범 <Bastard>가 나올 때까지 근성 있게 마이스페이스에 음악을 올리며 여느 이십 대가 그러하듯 스타벅스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말이다.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여섯 번째 앨범 <IGOR>는 진지함과 코믹함 사이를 오가는 ‘이고어’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컨셉 앨범이다. 커버 디자인은 꽤 단순하지만, 분홍색 배경이 사랑의 테마를 적절히 암시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타일러는 상반된 두 가지 이미지로 1인 2역을 연출하기도 한다. 힙합 앨범이라고 하기엔 소프트한 구석이 있지만, 과거에 가졌던 호러 코어라는 타이틀이 연상되는 다크한 트랙들도 실려 있다. 힙합, 알앤비, 네오 솔 등 여러 요소들을 혼합한 결과물로 이해되는 <IGOR>는 그의 첫 번째 그래미 수상작이었고, 플레이보이 카티(Playboi Carti), 솔란지(Solange), 칸예 웨스트(Kanye West) 등 쟁쟁한 게스트 뮤지션들이 참여해 눈길을 끈다.
오프닝 트랙 Igor’s Theme에서 둔탁한 신스음과 노이즈로 서막을 연다. 청춘의 고뇌가 스민 듯한 가사와 사운드의 조성으로 아우라의 덩어리처럼 다가오는 이 곡에 왜인지 모르고 비밀스럽게 반응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Earfquake는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홀로 남은 사람의 처절한 호소로 가득 차 있다. ‘떠나가지마, 다 내 잘못이야… 당신은 내 땅을 뒤흔들어 버리니까(Don’t leave, it’s my fault … ‘cause you make my earth quake)’는 떠나간 연인이 그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 충분히 느껴지는 최후의 한마디. 기본적으로 처절한 상황이지만 구구절절하지 않은 것이 매력이라 할까. 단지 ‘earth’라는 단어에서 th를 f로 바꾼 것이, 금발머리 이고르 캐릭터의 소심하며 허스키한 창법이 나름대로 시크한지도 모르겠다. 이어지는 I Think에서는 솔란지가 피처링에 참여했다. 가사는 사랑에 빠졌다고 느끼는 사람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섬세한 분위기가 감도는 이 곡의 엔딩은 피아노로 심플하게 처리해 사색적 분위기를 유도한다.
Running out of Time은 ‘너의 물속에서 평화롭게 잠긴 채’ 고요하게 요동치는 듯한 노래. 그에게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 시간이 부족하다. 때때로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이야기는 슬픔을 빛나게 채색하는 반항적인 개성과 시적 아름다움을 지녔다.
결국 그의 사랑은 I Don’t Love You Anymore에서 이제 정말 끝났다고, 그건 시간 낭비였다고, 헤어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선언한다. 노래인지 랩인지 연기인지, 코미디인지 비극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거나 아니면 그것들이 모두 조금씩 뒤섞인 이 노래는 서정적이며 흥미롭게 흘러간다. 클로징 트랙 Are We Still Friends?에서는 헤어진 연인과 친구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을 언뜻 내비치는데, Al Green의 Dream을 샘플로 쓴 걸 보면 이것이 상대와 별 관계없는 화자의 바람인 것 같은 뉘앙스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 앨범을 통해서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감각과 다재다능한 연출력이 음악과 접목해 서로 호혜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음악은 ‘힙’하면서도 재미있다. 물론, 이 앨범이 나온 지는 꽤 됐지만, 이건 요즘 음악이고 요즈음의 트렌드에 맞고, 이런 음악을 요즈음의 사람들은 듣고 즐기는구나, 생각했다. 이런 화법이 젊은 사람들의 언어인가, 싶은 생각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재능들을 어떻게 발굴해 갔는지,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 문득 신기하게 느껴졌다. Odd Future 컬렉티브 활동이 그의 행보에 든든한 토양이 되어 주었을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신을 믿고, 어떤 좌절의 광풍이 불어닥쳐도 흔들리지 않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일상의 작은 입김과 바람에도 섬세한 영혼은 통째로 흔들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현실적 충돌의 경험들이 창의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가진 개성을 끝내 보석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예술가란 일종의 영웅이고 행위에 대한 지난한 헌신을 밑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작업이란 성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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