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ble, Fable / Bon Iver


본 이베어의 다섯 번째 앨범 <Sable, Fable>이 막 도착했다. 이 앨범은 말 그대로 Sable과 Fable 두 개의 파트로 나눌 수 있다. 분량으로 따지면 Sable은 일종의 도입부에 해당한다고 생각될 만큼 작은 규모를 이룬다. 앨범의 타이틀도, 커버 아트워크도, 본 이베어의 지난 앨범들이 보여주던 넘쳐나는 심벌의 복잡함을 걷어내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심플한 구성을 취했다. <22, A Million>, <i,i>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본 이베어의 새 앨범이라는 데에 의아함부터 들지 모른다. 하지만 갈색이 은은히 어른거리는 검정의 네모 박스와 ‘연어색’이라 불리는 주황을 띈 분홍의 조화, 혹은 대비, 수수께끼 같은 배치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데뷔 앨범 <For Emma, Forever Ago>가 남긴 깊은 인상을 다시 떠올려 보면, 본 이베어가 ‘여기까지 왔구나’싶은, 놀라움과 기대, 그리고 안도와 같은 감정들이 동시에 생겨나 마구 뒤엉키기 시작한다. Sable 파트의 곡들은, 저스틴 버논이 위스콘신의 외딴 오두막에서 은둔하듯 지내며 만들었던 거칠면서도 우아함이 감도는 슬픈 노래들을 무리 없이 되새겨준다. 그래서 작년 가을 <Sable> EP가 공개되었을 때, 제대로 과거 회귀적인 익숙한 그의 어둠이 어쩔 수 없이 반가웠던 것 같다. 이제 본 이베어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한 앨범을 만들 거라고 추측하게 했다.

순서대로, Sable 파트의 파멸적 아름다움부터 감상해보자. 혼자의 생각에서 일기장에 몰래 적은 글귀들을 보는 듯 내밀하고 낯익은 기분을 선사하는 어두운 트랙들. 뒤에 남겨진 것들의 무한한 팽창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음을 말하는 무거운 심정을 포착한 Things Behind Things Behind Things. 자기비판적 태도와 근심하는 자아의 섣부른 인식 따위를 담아낸 S P E Y S I D E. 그리고 Sable 파트의 마지막 트랙 Awards Season은 이제 본 이베어 음악의 새 지평이 되는 Fable 파트를 연결할 만한 최소한의 싹을 지닌 곡으로 이해된다. 



아직 기쁨의 무대로 뛰어들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매혹적인 Sable의 유령이 아직 당신의 감정을 거머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면, Fable을 듣는 건 잠시 미뤄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뮤지션의 의도를 이해하고 잘 읽어낸다고 해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접근하는 건 역효과가 날지 모르니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Sable을 듣고 충분히 텀을 둔 다음 Fable을 듣는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엘피를 턴테이블로 연달아 재생할 때, 45rpm에서 33rpm으로, 어지간해선 바꿀 필요 없는 스피드 세팅을 바꾸어야 한다. 세팅을 바꾸면서라도 둘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슬픔의 유령이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순식간에 Fable의 세계로 진입해버리는 꾀가 필요하다. 다음 단계는, Sable의 무게가 홀연히 당신에게서 증발해 사라지도록 음악에 머물면 된다. 어두운 비전의 포크 곡들보다는 릴랙스되며 그루브 있는 이 새로운 색깔의 노래들은 느리게 움직이거나 거의 미동도 없는 당신의 기분의 방향을 틀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고 일관되게 이어진다.

고뇌와 근심의 독백이 눈부신 발견으로 전환된 Short Story부터, 모든 것이 평화로운 사랑이며 그것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 Everything Is Peaceful Love에 이어 Walk Home은 낭만적인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존 윌슨(John Wilson)의 재치 있는 뮤직비디오 이야기와 함께 저스틴 버논이 남긴 메시지가 인상적이라 이곳에 옮겨보고자 한다. 그는 Everything Is Peaceful Love를 만들 때 새 앨범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알 수 있었고, 행복과 기쁨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형태이자 생존의 진정한 부양성이라는 생각, 그리고 자신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The idea that happiness and joy are the highest form and the true buoyancy of survival, and even taking yourself less seriously could heal the world.)

‘네 마음을 괴롭히지 마 / 그저 네 시간에 내 사랑을 받아들여(Don't let it trouble your mind (Your mind) / Just take my love in your time)’라는, 위로와 화합의 메시지를 그려내는 From. I’ll be there과 If Only I Could Wait에서는 다니엘 하임(Danielle Haim)이 피처링에 참여해 분위기를 조금 색다르게 이끌어 간다. 이 두 개의 곡은 순서를 바꾸어 이해해야 할까? If Only I Could Wait은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에 대한 감정을 유지하기 힘든 연인의 상황을 그리고, I’ll Be There에서 메아리치는 그녀의 목소리는 거기에 있겠다고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반영하므로 자연스럽게 두 곡이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확실히 힘을 뺀 듯 레이드 백 스타일의 느슨한 트랙 There’s A Rhythmn, 가사 없이 앰비언스로 채워진 마지막 트랙 Au Revoir로 이 밝고 새로운 무대도 서서히 페이드아웃된다. 문득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잘 믿기지 않는다. 그 가을 Sable에서 시작된 여정이 봄의 Fable로, 그리고 여름으로 넘어오는 계절의 변화를 닮은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쁨, 충만감, 위로하는 마음, 기다림, 희미해지는 감정 등 Fable에 그려진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사랑의 생동감을 이끌어낸 Fable의 초반부 노래들이 흥미로웠다.

종종 어떤 예술가, 어떤 뮤지션, 어떤 작가가 급격한 변화를 보여줄 때, 그렇지만 충분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을 때 그들을 지켜보는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때가 있는 것 같다. 변화라는 건 언제나 말로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Sable, Fable>에 담긴 변화, 혹은 이행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파악되도록 애를 쓴 흔적과 함께 드러난다. 너무 단순해서 더 생각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 단순함 뒤에 계속해서 숨은 의미가 남겨져 있는 듯, 상반된 두 세계의 경계와 관계에 대해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본 이베어는 절망의 끝에 도달하던 감정의 무게와 속도를 그대로 가지고 이번에 단지 반대쪽 끝을 향해 밀어붙여 본 것 같다. 뮤지션도, 글을 쓰는 나도,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우리 모두 사람인 관계로 슬픈 이야기보다 긍정적인 메시지나 이야기를 듣기를 내심 더 원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본 이베어의 <Sable, Fable>은 환영할 만한 흥미롭고 사랑스러운 새 앨범이다.


-참조-

https://youtu.be/BWfQYYDhefs?si=G6pG1cDVAcUaZreq
https://youtu.be/WH2HwdfXme0?si=UeIp1QC4h39U-0ld
https://www.stereogum.com/2296917/bon-iver-everything-is-peaceful-love/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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