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key 17 Original Soundtrack / Jung Jae Il

   

우주라는 미지의 무대는 인간에게 상상 이상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상상 이상으로 유해할 수도 있다. 목숨이 하나뿐인 불완전한 인류에게 수차례 재생산이 가능한 ‘익스펜더블’이 있다면 과학적 발전의 가능성은 매우 효율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계속해서 죽어야 하는’ 익스펜더블의 운명을 살게 된 미키의 캐릭터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쉽게 눈물을 쏟을 만큼 감성적이고 화를 낼 줄 모르고 저항할 줄 모르는 나약하고 순종적인 성격으로 그려졌다. 하긴, 빚에 쫓겨 도망친 처지에 우주에 갔다고 한들 무슨 인생 반전이 일어나길 바라겠는가. 한마디로 ‘루저’ 같은 ‘미키’는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에게 웃음과 연민, 그리고 공감을 동시에 자아낸다.

미키 17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두텁게 만드는 존재들은 아마도 미키 18과 나샤일 것이다. 미키 18은 미키 17이 가진 본성과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의 소유자로 둘은 서로의 분신과 같고, 나샤는, 1부터 17 가운데 어떤 특정 성격의 미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리프린트 되는 미키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초반에는 나샤와 미키가 품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육체적 갈망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가볍게 비춰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나샤가 ‘특공대’급 역량을 지닌 보안요원에서 불의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세우며 온화한 ‘여성 지도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서, 완전한 형태의 사랑, 숭고한 사랑의 모습으로 점진적으로 이행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좋은 것이 <미키 17>인가, 하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좀 고민이 되지만, 아무튼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음악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정재일이란 뮤지션의 이름에 오래 노출되어 왔지만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데뷔 초기의 긱스 활동이나 창작국악그룹 푸리, 소리꾼 한승석과 함께한 크로스오버 성격의 작업이나 미술가 장민승과 함께 한 ‘상림’ 프로젝트 등, 그동안 내가 접한 뮤지션의 이름은 공동의 프로젝트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저마다 색채가 분명한 팀들인데 프로젝트마다 거기에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어떤 보편적 재능이 그에게 있는 걸까?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이름은 세계적 위상을 얻은 한국 영화의 음악들과 함께 다시 들려 오기 시작했다. 마치 박찬욱 감독과 오래 작업해온 조영욱 음악감독처럼, 봉준호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 이후 작품들인 <옥자>, <기생충> 그리고 <미키 17>의 영화 음악을 정재일 음악 감독이 맡아 오고 있다. 그러는 사이 2023년 그의 솔로 앨범 <Listen>이 클래식 레이블 Decca를 통해 발매되었다. 피아노 연주곡들로 채워진 이 솔로 앨범은 뮤지션의 ‘듣기’에 대한 탐구를 펼쳐 보인다.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속에 무게감 있는 어두운 이야기들도 깃들어 있어, 문득 가슴이 먹먹해질 것 같다. 뮤지션의 솔로 앨범 <Listen>은 의뢰를 통해 만들어져온 기존의 영화 음악 작업들과는 사뭇 색채가 다르다. 하지만 ‘자연’의 소리, ‘지구’의 소리 들을 들으려 했다는 점에서 궁극에는 <미키 17>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Listen>에 대한 인터뷰에서 뮤지션이 피아노 연주에 대해 ‘말보다 더 편하다’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밖에도 유독 눈에 띄는 한 가지는 뮤지션이 중학생 시절 재즈 아카데미에 들어가 연습하면서 기타리스트 한상원의 눈에 띄어 그룹 ‘긱스’의 일원이 되고,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음악의 현장 속에 일찌감치 뛰어들어 일궈온 자신의 음악에 대해 근본 없다고 느낀다는 발언이다. ‘근본 없다’는 말은 구어에서 꽤 부정적 어감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대체로 지나친 겸손에 가깝다. ‘근본이 없’어 그만큼의 자유를 얻었을 것이고, 그건 분명 창의적 작업에서 이점으로 작용했을 테지만, 그로 인해 떠안아야 하는 대가는 상당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거치는 아카데믹한 수련 과정이 없었을 뿐, 그가 ‘근본 없이’, 닥치는 대로 배우고 연구하고 실험한 과제들이 충실히 쌓여 왔기에 지금의 그가 있는 게 아닐까.

정재일의 음악 커리어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 <기생충>뿐만 아니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시리즈 <오징어게임> 등을 아우르고 있다. 저마다 ‘요즈음’의 작품들인 것을 보면 그만큼 젊은 감각이나 참신한 접근, 새로운 해석 등을 요하는 꽤 까다로운 작품들을 작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기생충>과 <미키 17> 음악은,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을 가진 영화에 꼭 부합하듯 이야기나 장면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탁월한 트랙들을 선보인다. 마치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지 않고 슬프게 보이거나, 슬픈 것이 슬프게 보이지 않고 웃기게 보이는, 의도적으로 감정을 교란하거나 서로 모순되는 그것들을 중첩시켜 하나로 보이도록 하고 거기에 이상하고 애매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현실에 대한 예리한 풍자와 반영이라는 듯한 영화의 시선을 음악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프닝 트랙 Bon Appetit은 생의 아이러니 그 자체를 함축한 것 같다. 죽는 게 일인 미키의 직업은 거기에 아무리 코믹한 요소가 첨가되었다 해도 본질적 서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Bon Appetit(맛있게 드세요)’은 크리퍼들에게 끌려가면서 ‘이제 또 죽겠구나’ 하고 느낀 미키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크리퍼들은 미키를 죽이거나 잡아먹지 않고 지상으로 올려 보낸다. 이건 사건이다. 인간들은 ‘익스펜더블’인 미키를 죽도록 하고 다시 새롭게 생산해 놓지만, 크리퍼들은 그를 ‘한 번도’ 죽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영화의 또 다른 시작인 셈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캐릭터였던 만큼 Nasha는 음악을 풀어나가는 데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 곡에 쓰인 선율이 다른 곳에서 반복되면서 라이트모티프 역할을 하기에 Nasha는 그 중심이고 여러 메시지들이 응축된 하나의 원형의 메아리와 같다.



미키가 바이러스를 흡입한 뒤 피를 토해내며 죽음을 거듭한 덕분에 마침내 개발된 백신. 미키의 희생으로 인간은 산소를 공급하는 별다른 장비 없이 우주의 공기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백신 발명에 대한 열망의 치솟음에 비례해 미키가 희생되는 과정은 갈수록 빨라져 그의 죽음과 리프린트가 거의 ‘처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악기 선율로 유도하는 Vaccine은 백신 탄생을 기리는 거룩한 축제인 한편 세상에 다시없을 코믹함과 설움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Barnes는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티없는 맑은 슬픔이 웃음을 제압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아, 이거 꽤 슬픈 영화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무언가가 변화했고,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했고, 무언가가 무언가로 이행했는데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 내부에서도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고 느낄 수 있었다.

A면이 피아노를 기반으로 한, 클래식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낯선 감각이 살아 있는 스코어 음악들을 선보였다면, B면은 원기 왕성한 오케스트라와 조금 원시적인 제3세계 분위기를 흡수하여 그려내며 동서양, 전통과 현대가 혼합된 이색적인 트랙들로 구성되어 있다. 팀파니 연주로 시작부터 남다른 Mayhem. 이 곡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런던 싱어즈의 합창을 들려주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Chaos에서는 몽골의 전통 창법인 ‘흐미’를 도입해 외계 행성의 원주민들인 ‘크리퍼’들의 존재를 되새기며 음악의 범위를 과감히 확장한다.



클로징 트랙인 Rejoice in the Lord는 영화 속 만찬의 자리에서 악당 마샬을 중심으로 그의 아내 일파와 측근들이 함께 부른 곡이다. 배우가 극 중에서,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종종 부른 이 찬송가를 누가 기대하고 들을까? 이 마지막 트랙은 그동안의 긴장을 완화하는 쉼표이자 마침표다. 감독의 전작 <기생충>에서 배우 최우식이 부른 엔딩곡 '소주 한 잔'을 연상케 하는 유일한 보컬 곡이기도 하다.



<미키 17>에서 ‘통역기’가 등장한 것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작업을 통틀어 볼 때 일종의 ‘진화’로 비춰진다. <옥자>에서 동물해방전선의 우두머리인 제이가 ‘통역은 신성하다’는 말을 남겼던 것을 되새겨 보면, 미자가 옥자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옥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던 걸 되새겨 보면 말이다.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자연에 가까운 매개와 소통하고자 한 인간의 욕망이 그의 영화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데 <미키 17>에서, 외계 생명체인 크리퍼들의 언어를 영어로 통역할 수 있어 그들과 대화도, 농담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백신이 개발되었듯 그들과의 소통이 가능해진 그런 날이 온 것이다. 정재일 음악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음악 작업을 영화의 언어를 음악으로 ‘통역’하는 일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다. 음악을 통역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더 새롭고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는 다른 관점과 해석의 지평이 열릴 거란 기대가 생긴다.


(<미키 17>을 보고 나서 더 생각이 난 <옥자>의 예고편 영상)


-참조

https://www.yna.co.kr/view/AKR20250308013800005

https://www.yna.co.kr/view/AKR20231113153800005?site=mapping_related

https://www.vogue.co.kr/2023/02/24/33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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