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Days of Summer Original Soundtrack / Various Artists

    

마이너한 감성이 묻어나는 로맨스 영화 <500일의 썸머>는 연인 관계에 대한 아이러니한 질문을 남긴다.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다양한 문화적 코드들을 제외하고 스토리가 포커스를 맞춘 지점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연인의 서로 다른 사랑관이 자리해 있다. 톰은 진정한 사랑을 믿는 쪽, 썸머는 사랑이란 판타지라 믿는 쪽이므로 둘은 사랑에 대해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썸머는 음악에 대한 좋은 취향을 가졌다. 전형적인 미인 같지는 않지만 묘한 매력이 있어 늘 인기가 많았고,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솔직한 성격은 썸머라는 캐릭터를 더 돋보이도록 만들었다. 톰과 썸머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데이트를 시작하는데, 썸머는 깊은 관계에 빠지고 싶지 않다며 선을 긋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톰과 헤어진 뒤에 그녀는 톰이 말했던 것처럼 운명의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한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엘리베이터 신이 아닐까. 무심하게 헤드폰으로 더 스미스(The Smiths)의 음악을 듣고 있는 톰. 같이 탄 엘리베이터에서 썸머는 헤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노래에 귀 기울이며 자신도 더 스미스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서로가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이 상황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알지 못하던 두 사람을 순식간에 비슷한 부류의 공동체로 묶어버린다. 무수히 많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들이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이루어질 가능성’ 한 가닥을 남기는 마법의 대화. 연애의 시작에는 대체로 이런 종류의 교류가 있을 것이다. 썸머는 더 스미스의 노래 한 구절을 따라 부르고 태연히 사라져버리고, 톰으로서는 황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엘리베이터 사건 이후 톰은 혼자만의 망상을 키워가는데 그를 잘 아는 오랜 친구들은 나름대로 그에게 객관성을 일깨워 준다. 톰의 조숙한 여동생 레이첼도, 때때로 썸머로 인해 통제 불가능한 모습으로 추락하는 톰을 구출한다. 톰의 주변에 머무는 위의 인물들 덕분에 영화가 햇살처럼 다정하고 한결 따스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500일의 썸머>는 로맨스의 사소하고 소박한 모습들을 사랑스럽고 디테일하게 잘 그려냈다. 약간은 시니컬하게, 한 연애의 시작과 끝을 면밀히 탐구한다. 비록 함께는 아니더라도, 톰과 썸머는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각자의 삶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사운드트랙은 이들의 연애처럼 싱그럽고 풋풋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어떤 노래들은 영화의 스토리 내부에 등장해 긴밀한 연결고리를 만든다.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 신에서 썸머가 따라 부르는 더 스미스(The Smiths)의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이 있다. 더 스미스의 히트 트랙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는 톰이 자신의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직접 재생하는 곡이다. 사운드트랙에 실리진 않았지만, 사랑에 빠진 톰과 함께 패트릭 스웨이지(Patrick Swayze)의 She’s like the wind가 잠깐 흘러나오기도 하고, 썸머는 회식 자리에서 원래 부르려고 했던 노래가 Sugar town이 아니라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의 Born to run이라는 언급도 한다. 썸머는 고양이 이름도 브루스라고 지었다고 하는데, 톰이 뉴저지가 고향이고 브루스 스피링스틴도 뉴저지 출신이라 이 부분은 약간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뉘앙스였다. 영화는 이런 장면들을 통해 주인공들이 음악으로 인생을 생각하고 문제에 접근하기도 하는, 독특한 자기 주관을 가진 인물들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더 스미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톰과 썸머 두 사람의 관계를 잇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어쿠스틱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발라드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는 더 스미스의 원곡과 함께, 썸머 역을 맡은 조이 데이셔넬(Zooey Deschanel)이 몸담은 그룹 쉬 앤 힘(She & Him)의 커버 버전이 함께 실려 있다. 사실 더 스미스를 비롯한 우울한 영국 록 음악들은 톰의 성장기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정체성과 성격, 사고방식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그의 사상의 뿌리와 다름없다. 그런 그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여성이 눈앞에 있다면 그로서는 집착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반복해 보면서 안타깝게 느껴졌던 점이 하나 있다. 톰이 썸머를 소유하려고 하거나 관계를 규정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면 썸머가 오히려 그의 배려를 느끼고 안정감을 가졌으리란 생각이었다. 물론 톰은 그럴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다. 취향에 대한, 썸머와의 놀라운 공통점을 이야기하자 조숙한 레이첼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조언한다. ‘어떤 예쁜 여자가 오빠의 괴상한 취향과 비슷한 것을 가졌다고 해서 두 사람이 반드시 천생연분이란 뜻은 아니야’라고. 레이첼은 영화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어리지만 가장 냉소적인 인물이었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던 러시아계 미국인 뮤지션 레지나 스펙터(Regina Spektor)의 Us는 바로크 팝 스타일 트랙으로 당당함이 남다른 보컬을 선보인다. 블랙 립스(Black Lips)의 Bad Kids는 가라지 록 스타일 곡으로 청춘의 저항정신을 풋풋하게 담아내고 있다. 더 템퍼 트랩(The Temper Trap)의 Sweet Disposition은 몽환적인 사운드스케이프에 멜로디를 더해 눈길을 사로잡는다. 톰이 동경하는 LA의 고층 빌딩들 장면들과 함께 흘러나오며 톰이 썸머에게서 눈을 돌리고, 자신의 꿈에 집중하는 순간을 뒷받침하는 노래로 사용되었다. 나아가, 그가 썸머 이후 새로운 여인 어텀을 만나게 되는 전주곡 같은 노래이기도 하다.


홀 앤 오츠(Daryl Hall & John Oates)의 You make my dreams와 함께 영화는 불현듯 한 편의 뮤지컬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톰이 썸머와 잠자리를 한 다음 날 아침 기분이 한껏 들뜬 그의 내면 풍경을 그리고 있다. 즐거운 사람 눈에는 즐거운 사람들만 보이고 춤추는 사람 눈에는 춤추는 사람들만 보이는, 그런 순간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이 곡이 가진 경쾌한 리듬과 넘치는 긍정 에너지로 사랑스러운 댄스 신이 만들어졌다.

두 장의 Lp 중 세 번째 면은 이 사운드트랙 앨범의 히든카드다. 카를라 부르니(Carla Bruni)의 샹송을 시작으로 캐나다의 싱어송라이터 파이스트(Feist)의 Mashaboom의 담백하고 서정적인 포크 트랙을 배치하고, 레지나 스펙터의 이모셔널한 피아노 발라드 Hero가 뒤를 잇는다. 앞선 록 음악들과 상반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의 우아한 분위기로 물들어 있다. 이 사이드를 마무리하는 트랙은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1968년 발표작 Bookends이다. 과거의 히트 포크송, 샹송, 피아노 발라드 등이 어우러진 이 노래들의 연속은 제법 편안하고 운치가 있다. 여기에서 혼돈스러운 생각을 멈추고, 잠깐 휴식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쉬 앤 힘의 커버 버전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는 잔향 때문에 원곡보다 사운드가 더 풍성한 느낌이다. 그동안 썸머가 얽히고 설킨 여러 관계들을 묘사하기라도 하는 듯한 풍경. 썸머가 회식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 같기도 하고, 조이 데이셔넬이 무대 위에서 부르는 것 같기도 한 이 노래는 ‘내가 가진 운이 좋은 사람을 나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걸 봐(See, the luck I've had / Can make a good man turn bad)’라며 비관적 상념에서 발을 떼지 못한 화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여름 밤을 가르는 번개 같은 슬픔 한 줄기를 각인시키며 불운한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혼잣말처럼 애원한다. 톰과 썸머를 연결시켰던 더 스미스의 음악은 끝내 이뤄지지 않을 사랑의 전조였을까.

<500일의 썸머>는 너무 웃기거나 너무 슬프지 않은, 너무 튀거나 너무 지루하지도 않은 로맨스 영화다. 연애가 시작되기 전 누군가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그 감정이 서로 일치한다는 걸 확인해 연인으로 맺어지는 사건은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이로운 일 중 하나다. 결실을 맺든, 그러지 못하고 헤어졌든 간에 모든 연애의 경험은 특별하다. 아마도 이 영화는, 이루어진 연애보다 이루어지지 않은 연애를 돌아보도록 만들면서, 필연적으로 연애의 경험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교훈을 남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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