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pid Deluxe / Blood Orange

블러드 오렌지(Blood Orange)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흑인 뮤지션의 본명은 Devonté Hynes이고, 줄여서 데브 하인즈(Dev Hynes)라 불린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부모를 둔 그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룹 테스트 아이시클스(Test Icicles) 활동에 참여한 뒤 솔로 프로젝트 라이트스피드 챔피언(Lightspeed Champion)으로 음악 이력을 쌓아 가던 중 뉴욕으로 활동 거점을 옮겼다.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 프로듀싱 작업을 병행하면서, 새로 옮긴 터전에서 이방인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접한 뉴욕의 복잡한 풍경과 소리가 스며든 데뷔작 <Coastal Grooves>를 발표했다. 그런데 그가 포커스를 맞춘 지점이 예사롭지 않다. 이 음반은 1980년대 후반 뉴욕의 밤 문화와 게이 신을 주제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2집 <Cupid Deluxe>와 데뷔작 두 앨범의 커버에서 일관적으로 트랜스젠더 모델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히는 그들이 활동하던 클럽에서 찍은 사진들을 발췌해 자신의 음악과 함께 재해석되게끔 수면 위로 드러냈다고 해야겠지만, 이 두 작업의 테마는 뉴욕의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숨겨진 부흥기에서 뮤지션이 많은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더 궁금하다면 다음의 링크를 통해 포토북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 https://powerhousebooks.com/books/the-forty-deuce/)
1980년대와 90년대 뉴욕의 볼룸(Ballroom) 문화는 백인 사회를 비롯해 주류 게이 신에서조차 소외된 흑인과 라틴계 성소수자들이 만든 대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대에 선 트랜스 여성 퍼포머들은 일상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상당히 멸시받는 혹독한 삶을 견뎌야 했지만, 한편으론 밤의 무대에 오르며 자신다움을 당당히 드러내고 예술적이고 엔터테이너적인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꽃피우게 된 이 하위문화는 런던에서 온 이방인 데브 하인즈의 눈에 새로운 유형의, 매우 아티스트적이고 주체적인 흑인 인물들의 무브먼트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Cupid Deluxe>는 전작의 음악적 팔레트를 더욱 확장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유동적 협업의 구조를 내부적으로 확립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문화적 특색으로 인해 그의 음악은 사회적인 맥락으로도 읽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오프닝 트랙 Chamakay에는 캐롤라인 폴라첵(Caroline Polachek)이 피처링에 참여하고 있다. 몽환적 색채와 잔잔한 울림으로 페미닌하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조화롭게 형성했다. 두 번째 트랙 You’re Not Good Enough은 펑키한 기타 리프와 그루비한 사운드 구조로 특색을 이루고 보컬에서도 더 굴곡 있는 스타일을 선보인다. Uncle ACE는 더욱 빠르고 촘촘한 전개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노래는 높낮이 없이 플랫하게 불려지지만 뒤로 갈수록 느와르 영화 같은 서사적 분위기를 그려내면서, 자연스럽게 그 시절 뉴욕의 뒷골목을 상기시킨다.
It is What It is는 마림바 도입부로 말랑하게 시작했던 곡인데 뒤로 갈수록 황폐해지는 구조를 보여준다. 캐롤라인 폴라첵이 두 번째로 참여한 Chosen은 처음 이 앨범을 들었을 때 가장 끌렸던 곡이었다. 하드한 비트와 퓨전 재즈 분위기를 내는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결합해 운치 있는 낭만적 풍경을 구성했다. 저녁 시간대의 한적함을 그린 듯한, 느림의 간결한 아름다움을 쉽게 외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Clipped On과 High Street에서는 래퍼들과 협업해 곡을 완성했다. 랩을 통해 힙합 색을 입힌 두 곡이지만 데스팟(Despot)이 피처링한 Clipped on과 스켑타(Skepta)가 피처링한 High Street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Clipped on은 이스트 코스트 랩 스타일을 보여주고, High Street의 스켑타는 런던 그라임 신의 대표 주자인 만큼 훨씬 어둡고 절박한 상황을 묘사한다. 클로징 트랙 Time Will Tell에서는 다시 분위기를 도시의 멜랑콜리한 로맨스 무드로 전환시킨다. It is What it is의 피아노 버전처럼 느껴지는 이 곡은 연인에 대한 갈망을 부드럽게 표현하며 서정미를 드리운다. It is What it is에서 사만다 우르바니(Samantha Urbani)가 코러스부를 메인으로 맡았던 분위기와 다르게, 여기서는 데브 하인즈가 메인 보컬이 되어 낮고 무거운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블러드 오렌지의 음악은 일렉트로닉과 솔, 재즈 등이 가미된 몽환적인 얼터너티브 알앤비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흑인 음악의 정통성이 강하지 않고 여러 장르의 혼합이 매끄러운 점이 큰 장점이라 생각된다. 특히 이 앨범은 여러 뮤지션들과의 협업을 통해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구현한 음악성이 돋보인다. 1980년대 후반 뉴욕 뒷골목의 볼룸 문화란, 나로서는 어쩌면 평생 알 일이 없었을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흑인 젠더들의 삶은 너무 하찮게 여겨져 기록에도 남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숨겨진 이야기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인종과 성차별에 관한 역사의 한 파트를 이룬다. 이 앨범을 떠올릴 때 그들이 꽃피운 남다른 창의성과 그들의 영혼에 새겨진 불명예 또한 되새기게 될 것 같다.
필립 글래스와의 짧은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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