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anic Original Soundtrack / James Horner

    

너무 유명한 작품이라 <타이타닉>이 한국에서 처음 개봉한 1998년 이후 지금까지 이 영화를 여러 번 보게된 것 같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대해 글을 쓰는 날이 올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마침내 그 기회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쩐지 감격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단순히 영화나 음악에 대해 가지는 존경심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안 지 오래된, 영화와 나 사이에 놓인 두터운 시간의 퇴적이 새삼스레 요동치듯 움직이기 때문인 것 같다.

글을 쓰기에 앞서 우선 영화를 재감상했다. 3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의 압박이 있어도, 내용을 다 알고 봐도 한순간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코앞에 재난이 닥치자 분별력을 잃고 더욱 비열해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의로워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특히 끝까지 자신의 소명을 다하거나 자리를 지키는 인물들이 전하는 감동과 교훈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거대한 유람선에서 가장 호화로운 공간을 점유한 기품 있는 상류층 승객들과 가난하고 낭만적인 방랑자 잭과 같은 3등석 사람들의 위선 없는 모습이 교차하는 가운데 배의 엔진을 가동시키기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 또한 그려져 있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피할 길 없는 무게감을 완화시키는, 잭과 로즈의 로맨스 전개는 영화의 스토리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 놓여 있는 두 사람. 안목 있는 화가인 덕분에 잭은 처음 본 순간부터 로즈의 본성을 알아보고 특유의 명랑한 성격과 마인드로 그녀의 삶이 시들지 않도록 인도한다. 영화는 후반부부터 감동이 끊이지 않았지만, 정점을 찍은 건 아무래도 엔딩 신인 것 같다. 주름이 깊은 100세의 할머니가 된 로즈는 꿈을 꾼다. 타이타닉의 문이 다시 열리고 그 안은 환하다. 한 장의 사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잭이 시계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죽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이러한 해석은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사람이 품을 수 있는 보편적인 로망이자 상실의 트라우마에서 회복하도록 돕는 자기 치유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 음악가 제임스 호너(James Horner)는 조금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2015년 자신이 직접 조종하던 경비행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미망인이 된 아내의 발언에 의하면 뮤지션은 아스퍼거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비행기 모형 수집이 취미였는데, 그가 좋아하던 비행기가 그의 마지막 장소가 되었다는 게 비극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제임스 호너는 <타이타닉> 작업 후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아바타> 영화 음악도 담당했다. 론 하워드(Ron Howard) 감독과 <아폴로 13>, <뷰티풀 마인드> 등을 작업하고 영화 음악 작곡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론 기존의 레퍼토리를 재사용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타이타닉> 이전에 그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에일리언>의 스코어 작업을 한 바 있지만 감독에게 그 협업 경험이 특별히 각별하게 남지는 않았다. 감독은 처음에 <타이타닉> 사운드트랙을 엔야(Enya)에게 맡기고 싶었다고 한다. 그랬더라도 영화와 무척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아무튼 엔야와의 작업은 잘 성사되지 않았고 기회는 제임스 호너에게 돌아갔다. <타이타닉> 사운드트랙은 구슬픈 코랄과 심플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활용, 클래시컬한 오케스트레이션에 켈틱 모티프를 더한 음악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에일리언> 작업 후 제임스 호너에 대해 미지근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을 돌아보게 한 <브레이브하트> 사운드트랙. Main Title은 <타이타닉> 사운드트랙과 유사한 켈틱 모티프를 들려준다.

제임스 호너의 대표 트랙 중 하나인 <가을의 전설> 수록곡 The Ludlows.

엔야의 <반지의 제왕> 삽입곡 May It Be.


오프닝 트랙은 Never an Absolution. 아일랜드의 민속 악기 일리언 파이프(Uilleann pipes)의 느린 연주와 노르웨이 출신의 보컬리스트 시셀 슈사바(Sissel Kyrkjebø)의 노래로 구슬프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제임스 호너는 이 사운드트랙에서 시셀 슈사바와 가사 없는 노래를 진행하고, 또 신스에서 얻은 콰이어 보이스를 결합해 보완적 역할을 하게끔 했다. ‘Never an Absolution’은 면죄될 수 없는, 우리가 안고 있는 슬픔의 무게를 결코 덜어낼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타이틀을 언어적으로 생각하면서 이 곡을 들으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프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Distant Memories는 할머니 로즈가 자신의 기억을 되새기고 그것을 손녀와 탐사선원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이 곡은 벨 소리의 중첩과 울림으로 잠재의식 같은 영롱한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클래시컬한 오케스트라로 전환되면서 기억이라는 의식의 영역을 확장하고, 시간대를 순식간에 과거로 옮긴다. 100세가 된 지금과 저 깊숙한 곳에 잠긴 로즈의 머나먼 기억을 연결하는 과정을 음악적으로 간결하게 함축하는 트랙이다.



Rose는 로즈의 테마 곡으로 영화에서 반복되는 라이트모티프 테마 중 하나다. 이 트랙은 My Heart Will Go On의 키가 다른, 가사 없는 샘플이기도 하다. My Heart Will Go On이 팝 발라드의 표본적 연출을 했다고 보면 인스트루멘털 트랙 Rose는 켈틱 사운드와 시셀의 가사 없는, 중세풍 보컬로 탈 세속적이고 신비로운 감성으로 어필한다. 같은 선율을 가진 곡이라도 개성이 확연히 다른 셈이다.


My Heart Will Go On은 작사가 윌 제닝스(Will Jennings)가 가사를 붙이고, 셀린 디온(Celine Dion)이 노래해 <타이타닉> 사운드트랙을 대표하는 엔딩 크레딧 곡으로 탄생했다.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배에서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조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로즈도 마침내 구조선에 올라타지만, 그녀는 이대로 잭을 놓치면 영영 못 볼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결국 로즈는 구조선에서 뛰어내려 다시 배 안으로 들어와 잭과 함께 머물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놓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차디찬 바다에서 간신히 호흡하면서 잭은 마치 주문을 외우듯 그녀에게 일깨워 준다. ‘당신은 탈출할 거예요. 여기서 살아남아 아이도 많이 낳을 거예요. 아이들이 자라는 걸 보고 할머니가 된 다음 편히 죽을 거예요. 여긴 아니에요. 오늘 밤은 아니에요. 약속해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약속해요.’ 꼭 그의 말처럼 로즈의 인생이 흘러갔다. 그와의 약속을 실천하는 그녀의 삶은 비록, 잭과 로즈가 허구의 인물이라 해도,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My Heart Will Go On은 잭과 로즈 두 인물의 사랑의 테마다.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더라도, 사랑의 마음이 지속될 것을 예감하는 화자의 순결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느 순간 감정을 넘어 신념이 된 사랑. 그건 분명 사랑의 숭고한 모습이다. My Heart Will Go On은 한 번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할 운명에 놓인 두 사람의 귓가에 영원토록 들려올 아리아이다.



“Take Her to Sea, Mr. Murdoch"이라는 트랙이 있다. 잉글랜드 사우샘프턴에서 배가 출항해 북대서양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할 무렵 에드워드 선장이 항해사 머독에게 건넨 대사다. 여기에서 ‘her’는 타이타닉호를 가리킨다. 자연이나 바다를 여신에 비유하는 해양 전통이 있었는데 바다를 항해하는 배도 선원들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여성으로 의인화해 불렀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이 잭이 아니라 로즈인 것은, ‘그녀’를 되살리고자 한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게 장수한 삶을 산 로즈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뼈아픈 기억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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