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ldovers Original Soundtrack / Mark Orton and Various Artists

    

<바튼 아카데미> 사운드트랙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리뷰하려고 보관하고 있었는데, 11월의 시작에, 조금 이르지만 꺼내기로 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네브라스카>를 재감상했던 것이 이 작업의 잠정적인 시작이 된 것 같다. (사두고 뜯지 않았던 <사이드웨이> 사운드트랙도 얼마 전 개봉을 했으니… 그것도 조만간 리뷰해 보면 좋을 것이다) <네브라스카>는 알렉산더 페인(Alexander Payne)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가 스며 있는 영화이고, 흑백인데도 시각적으로 단조로움 없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과거에도 본 적이 있지만 이번엔 또 다르게 다가왔다. 영화에 그려진 상황이 유난히 실감 났다고 할까. 고집불통이 된 아버지, 그를 모시고 네브라스카로 향하는 아들, 거침없는 언변과 태도로 다정함을 찾아볼 수 없는 어머니로 구성된 그랜트 가족의 이야기. 일상적 서술 사이에서 웃음과 따스함을 이끌어내는 연출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사운드트랙 또한 기품이 있었다. 마크 오턴(Mark Orton)이 스코어를 담당했는데, 틴 햇(Tin Hat)이라는 재즈 기반의 챔버 그룹 멤버이기도 한 그는 스토리를 소박하게 투영하고 묘사해 영화에 매우 잘 어울리는 음악들을 선보였다. 별로 튀는 곳이 없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처럼, 마크 오턴의 음악도 튀는 데가 없어서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스타일이라 말할 수 있지만, 우연히라도 한번 방문한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런 작품과 음악임에 틀림없다.

크리스마스 코미디 <바튼 아카데미>는 꽤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체리쥬빌레를 제조하는 장면, 우리만의 비밀, ‘앙트레 누’를 이야기하는 장면들, 밀러를 맥주계의 샴페인이라고 비유하는 유머 등 독특한 질감과 감성이 영화의 분위기를 개성적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구조적으로 이 영화는 현실에 대한 풍자나 유머, 일상에 맞닿은 지지부진해 보이는 드라마를 포착하며 그 안에 깃든 휴머니티를 드러낸다. 비록 인물들은 대체로 현실과 불화하고 자기만의 생존 루트를 발굴해 구석에서 겨우 버티는 것 같은 삶을 살지만, 내부로는 아마도 세상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탐구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상한 일인지 모르지만 요즘은 영화를 보면 어느 한 인물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모습을 내가 조금씩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이 영화는 특히 그런 작품이었다. 나는 ‘왕눈깔’ 폴 허넘 선생의 괴짜 같은 면과 고집스러움을 갖고 있고, 앵거스 털리의 삐딱함과 어리석음을, 기숙사 식당 매니저인 메리의 비애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세 사람에게 연민을 가짐과 동시에 나의 일부들을 마주하는 것 같은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바튼 아카데미>는 마치 소설책 넘기듯 독서하는 기분을 주는 느린 호흡을 가진 영화다.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는 두 주인공의 ‘성장’을 슬며시 이끌어내며 끝을 맺는다. 허넘이 고향처럼 여기던 바튼을 떠나게 될 때, 고정된 듯 흐르던 자신의 삶에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털리도 깨달음을 얻고 적어도 소년인 그의 성장이 예고된다. 이 영화는 확실히 ‘외롭지 않은 사람’보다 ‘외로운 사람’에게 더 잘 통한다. 영화를 통해서, 그리고 작품을 통해 이런 것을 나누는 자체가 우리만의 비밀의 연대, 즉 ‘앙트레 누’임을 되새겨본다.


마크 오턴이 작업한 스코어들은 1/3만 수록되었고, 나머지는 영화의 배경인 70년대에 발표된 히트 트랙이나 크리스마스 클래식들로 채워졌다. 하긴, 크리스마스가 배경인 영화인데 캐럴 클래식들이 빠질 수가 없다. 다만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이 스코어와 함께 뒤죽박죽으로 실려 있어서 처음에 트랙리스트를 읽는 일이 복잡한 지도를 마주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분량 때문인지 몰라도 마크 오턴의 스코어들이 메들리 형식으로 여러 곡이 하나의 트랙으로 묶여 있었고 그것이 혼란을 가중시키는 포인트였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과 마크 오턴은 스코어의 방향을 잡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초기 단계에서, 악기도 영화의 배경인 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사용하는 방향을 취했다. 마크 오턴이 몸담고 있는 그룹 틴 햇의 음악을 떠올려 보면 이것이 그리 도전적인 주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운드트랙 프로덕션에 70년대에 성행했던 모노 오디오 포맷과 동일한 사운드 디자인을 추구하는 집념도 불어넣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도 철저히 그 시절을 바라보면서 일관된 무드를 반영토록 했다.

틴 햇(Tin Hat)의 곡 중 하나. <네브라스카> 사운드트랙에도 수록된 곡으로, 그룹의 색깔을 가늠해볼 수 있다.

첫 곡 Silver Joy는 영화가 막을 올리고 카메라가 눈 내린 교정 풍경을 비출 때 흘러나오던 곡이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봤는데, 그때 제법 익숙한 목소리라고 느꼈지만 누구의 것인지 잘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끝까지 기다렸다가 엔딩 크레딧을 유심히 읽은 기억이 난다. 이 노래만 단독으로 들었다면 이렇게까지 좋게 느끼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영화의 장면과 너무 잘 어울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결국 이 곡이 실린 다미엔 주라도(Damien Jurado)의 앨범 <Brothers and Sisters of the Eternal Son>을 청취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비록 이 트랙은 70년대의 산물이 아니지만, 어쿠스틱 기타만이 휑하게 놓여 있는 사운드 풍경은 시대적인 색채가 강하지 않고, 남겨진 ‘바튼맨’들의 침체된 홀리데이 무드에 힘을 실어주기에 더없이 좋았던 것 같다.



Venus와 The Time Has Come Today는 사이키델릭이 가미된 록 트랙들로, 영화가 조명하고 있는 그 시대의 히트곡들을 본격적으로 불러들인 것들이다. 챔버스 브라더스(The Chambers Brothers)의 곡은 시기적으로 미국에서 흑인 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 종식을 염원하던 흐름과 맞물려 저항곡으로 사용되었던 사연이 있다. 이 곡은 여러 버전으로 녹음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것은 4분 분량이지만 11분 버전의 곡에는 밴드의 색깔로 재해석된 캐럴 Little Drummer Boy의 주요 멜로디가 곡의 중반부에 수록되어 있다. 실감 나는 드러밍과 록 바이브가 물씬 풍기는 캐럴이 이색적이고 재미있게 들렸다. 뒤를 이은 마크 오턴의 스코어 Candlepin Bowling에서는 퍼지한 기타 사운드와 월리처 오르간의 조화가 노스탤직한 분위기를 매력적으로 창출하고 있었다.

Crying, Laughing, Loving, Lying은 1972년 발표된 라비 시프리(Labi Siffre)의 노래로 마지막에 폴 허넘이 바튼을 떠날 때 흘러나온다. 허넘은 즐겨 마시던 위스키로 입가심을 하고 그것을 눈 쌓인 길에 뱉어낸 뒤 새로운 인생을 향해 출발한다. 선생이라는 직업은 ‘말’로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기에, 이는 상징적인 의미로 비춰졌다. 라비 시프리는 영국의 싱어송라이터로 흑인이고 성소수자이기도 했다. 그의 노래는 사회운동가적 면모와도 맞닿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금 생소한 편이었지만, Crying, Laughing, Loving, Lying의 커버 버전도 많이 있고, 힙합 뮤지션들에게 그의 노래가 샘플링 되는 경우도 많았다.

휘트니(Whitney)의 커버 버전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I Wonder에 라비 시프리의 My Song이 샘플링 되었다


서던 록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록그룹 올맨 브라더스 밴드(The Allman Brothers Band)의 In Memory of Elizabeth Reed는 재즈 퓨전 느낌의 인스트루멘털 트랙이다. 이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진정으로 반가운 조우가 될 것이다. 학교장의 비서 크레인의 집에서 파티가 열렸을 때, 메리가 턴테이블 옆에 서서 디제이를 맡았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메리의 아들 커티스가 생전에 아티 쇼(Artie Shaw)를 좋아했다고 말한 뒤 그녀는 감정이 격해진다. 아티 쇼는 빅밴드가 성행했던 시기 큰 인기를 얻었던 클라리넷 연주자이고, 그러므로 이 곡은 70년대보다 훨씬 그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크 오턴의 스코어 Drive to Boston에서는 <네브라스카> 스코어의 서사적인 느낌을 되새겨볼 수 있었던 것 같다.

A와 B 면에 록 음악들이 주로 실려 있었다면, C 면은 전적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면 이 레코드의 C 면을 들으면 된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무드는 올드하고 차분한 쪽이다. 재즈 아카펠라 그룹 스윙글 싱어즈(The Swingle Singers)의 크리스마스 메들리가 첫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오스트리안 패밀리 보컬 그룹 트랩 패밀리 싱어스(Trapp Family Singers)도 아카펠라 형식의 캐럴을 들려준다. 아카펠라 형식의 캐럴들은 유독 오가닉하고 성스럽고, 또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이 곡들이 영화에 자연스럽고 따스한 공기를 부여했던 것 같다.

모타운을 대표하던 그룹 템테이션즈(The Temptations)의 Silent Night은 캐럴 중의 캐럴이다. 멜빈 프랭클린(Melvin Franklin)의 바리톤보다 더 낮은 베이스 음역의 노래는 요즘은 만나보기 드문 것 같아 뜻밖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캣 스티븐스(Cat Stevens)와 크루앙빈(Khruangbin)의 곡을 제외하면 D 면은 모두 마크 오턴의 스코어들로 채워져 있다. 캣 스티븐스의 The Wind는 71년 발표작으로 그의 앨범 <Teaser and the Firecat>에 수록되었다. 처음에 실린 다미엔 주라도의 곡과 유사한 포크 느낌의 수수한 곡이지만 한층 밝고 부드러운 톤과 철학적 질문을 품은 가사를 가졌다. 영화에서 A Calf Born in Winter가 흘러나왔을 때 반갑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곡을 통해 크루앙빈이라는 그룹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첫인상은 겨울의 풍경 속에서 다정함과 사랑스러움, 온기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내게 이 노래는 겨울에 태어난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달콤함과 포근함으로 기억 속에 자리해 있다. 따로 소장한 바이닐은 없어서 이 곡이 떠오를 땐 이 레코드를 플레이할 것 같다.


사운드트랙은 스코어 See Ya / Into the Unknown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고 보니 이 사운드트랙에선 영화 음악에서 필수품 같은 라이트모티프도 없었다. 그로 인해 지극히 담백하고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것 같은 음악이 된 느낌이지만 그러한 건조한 톤이 이 사운드트랙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Into the Unknown을 스코어의 주제적 트랙으로, 테마 트랙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바튼을 떠나는 허넘의 테마로.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 위에서 말했듯 허넘은 나의 일부이기도 하기에, 나는 이제 그와 이 영화를 보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던 것 같다. 그 아쉬움은 길고 복잡한 여정 같은 영화 음악과 함께 차츰 다듬어지면서,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변화해갔다. 어디에 있든, 어떤 식으로 살아가든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걸음들 앞으로 볕이 깃들기를 바라며. 라비 시프리의 노래처럼 우리는 울고 웃고 사랑하고 거짓을 말할 수 있고, 삶은 결코 스노우볼 속의 눈처럼 평온하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좋은 두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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