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 Dijon

올 한 해 보인 디종의 행보는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두 번째 정규 앨범 <Baby>가 처음으로 공개되던 지난여름 전후로, 본 이베어(Bon Iver)의 앨범 <SABLE, fABLE>의 피처링에 참여하고 팝스타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의 컴백작 <SWAG>에서 주요 프로듀서로 활약하며 그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렸다. 이러한 왕성한 컬래버레이션은 첫 그래미 노미네이션으로 이어지며 결국 그를 동시대의 음악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핵심 인물로 주목받도록 했다. 올가을 개봉한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는 단역이지만 배우로도 출연해 나로서는 이 뮤지션을 그냥 스쳐 지나갈 수가 없는 한 해였던 것 같다. 이만하면 ‘올해의 인물’ 중 한 사람이라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2021년 나온 데뷔 정규 앨범 <Absolutely>를 통해 디종은 개성이 매우 강한, 패기 넘치는 뮤지션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의 음악을 더욱 폭넓게 듣고 추적해 보면서 처음 각인된 ‘쎈’ 이미지 주변으로 부드럽게 번져가는 뮤지션의 실루엣을 그려볼 수 있었다.
디종의 노래들은 가사 전달력이 유난히 높아서 그 이유를 한 번 알아보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본적으로 허스키하고 거침없는 배짱을 지녔고 노랫말은 여과 없이 감정을 전달하며 청자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이건 언어나 노래의 놀라운 효능이기도 하다. 메시지, 이미지, 혹은 분위기 따위를 수신하는 입장에서 청자는 전달력이 남다른 디종의 노래들을 통해 애써 긴장하거나 노력하지 않고도 느닷없이 누군가의 진심을 듣게 되는 것이다. 높은 가사 전달력은 그의 음악에서 탁월한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보컬 프레이징의 탄성과 자유로움,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그루브는 타고났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은 블루스 정서와 리듬감을 지닌 채, 큰 굴곡을 그리며 청자의 감정 속으로 침투한다. 비유하자면 디종의 보컬은 지난번에 다룬 톰 웨이츠 못지않게 어글리하고 와일드한 스타일이다. 그래, 2020년 나온 Ep 앨범 <How Do You Feel About Getting Married?>의 수록곡 Alley-oop에 언급되는 Bloodhound의 이미지가 쉽게 연상된다.
애플 뮤직의 제인 로(Zane Lowe)와의 인터뷰에서 뮤지션이 스스로 말한 내용을 참조하면 새 앨범 <Baby>는 지금까지 나온 앨범들 가운데 가장 ‘자전적’ 성향을 내보이는 작품이다. 직설적인 표현을 곧잘 하는 만큼 디종의 노래에선 실존 인물들이나 연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baby’는 우리가 잘 아는 고유 명사고, 앨범명이기도 하지만 갓 태어난 그의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앨범은, 인간적 삶의 한 단계인 ‘아버지’의 지위에 처음으로 오른 뮤지션의 상태를 은밀히 고정시킨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열렬한 구애가 담긴 <Absolutely> 이후, 사랑을 이룬 뒤의 이야기인 <Baby>가 나타난 것은 지극히 연대기적인 포맷을 따른 결과다. 아, 그런데 ‘연대기적인 포맷’이라니, 이게 무슨 엉터리 같은 단어의 조합인지. 쉽게 말하면, 그냥 자신의 삶에서 재료를 찾고, 그것을 음악의 형태를 통해 표현해 사적인 이야기에 대한 공신력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오프닝 트랙 Baby!는 자전적 이야기의 꽃이다. 이 곡은 그야말로 아기 ‘베이비’의 탄생 일화를 다루고 있다. 나중에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자신의 기원이나 엄마 아빠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와 같은 사연을 궁금해할 때 들려줄 수 있을 법한 그런 이야기. 노랫말은 장황하지 않지만 충분히 디테일하고 정곡을 찌른다. 아기의 전설을 전하기라도 하는 듯한 구어적 보컬 톤에서 나는 언뜻 민요가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정교한 사운드 디자인을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 어딘가 왜곡되고 망가진 것 같은, 그러나 매혹적인 글리치 사운드와 간결한 샘플링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이상적이고 획기적이다. 커플은 기꺼이 청자를 자신들의 내밀한 기억의 공간으로 초대했다.
Rewind에 이르면, 결혼과 출산의 축복에 젖었던 감정들이 차츰 가라앉고 화자는 가만히 자신의 내부에서 포착된 감정의 풍경들을 관찰한다. 사운드도 한결 차분해져 어쿠스틱 기타의 부드러움을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굳이 장르 구분을 해보자면 디종의 노래들은 실험적 성향의 알앤비와 솔 계열이지만, 이 곡은 인디 포크 계열의 곡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뒤를 잇는 my man과 함께 이 두 곡이 앨범에 두터운 그늘과 밤의 파트를 구현하고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시디나 카세트, 바이닐 같은 피지컬 앨범을 구매하면 보너스 트랙 Nü Diamond를 들을 수 있다. 가사는 거칠긴 해도 다정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은데 사운드는 꽤 실험적이고 어두운, 그런 언밸런스한 매력의 트랙인 것 같다.
디종의 <Baby>를 통해 높은 황홀감에 젖은 노래들을 들었고 사랑과 욕망의 기록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어수선하고 복잡한 내면의 서사들을 오래 들여다보진 못하고 스쳐가기만 했지만 다음의, 그다음의 이야기들에서 기필코 다시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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