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24의 게시물 표시

Some Kind of Peace / Ólafur Arnalds

이미지
  아이슬란드 태생의 뮤지션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은 새롭거나 듣기 좋을까? 그리고 클래시컬한가? 그렇게 묻는다면, 모두 다 맞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대단히 틀을 깨는 발상으로 이끌어가진 않지만 자유롭고 경계가 흐린 음악을 들려준다. 때때로 둔중한 애통함으로 가슴 깊은 곳을 타격하고 악기가 가진 본연의 빛깔을 특유의 생동감으로 연출해내며 청자를 침착한 몰입으로 인도한다. 말하자면 그의 음악은 청자에게 대담하게 사색적일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그렇게 되도록 이끈다. 클래식 크로스오버, 인디-클래시컬, 포스트-클래시컬 등의 장르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그의 음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그의 이력에 관해 알아보던 중 굉장히 흥미로운 과거 행보를 접하게 되었다. 우선 그는 할머니의 권유로 어린 시절부터 쇼팽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이는 결국 그가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지만, 헤비메탈을 좋아하던 십 대 소년에게 쇼팽은 분명 듣기 싫던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차츰 쇼팽의 음악을 향해 열리고 나아가 클래식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도 기르게 되었다. 할머니와 함께 쌓은 특별한 추억 덕분에 쇼팽은 그에게 유독 친밀하고 중요한 작곡가로 남게 되었고, 나중에 피아니스트 앨리스 사라 오트(Alice Sara Ott)와 함께 새로 작곡한 트랙들과 쇼팽을 곡들을 재해석한 <The Chopin Project>를 작업하게 된다. 두 번째로 독특한 그의 이력은 헤비메탈 밴드에 가담했던 사실이다. 독일 밴드 Heaven Shall Burn의 아이슬란드 투어에서 드러머로 활약하며 밴드에게 자신이 손수 만든 데모 테이프를 건넸는데, 반응이 좋았고 그룹은 그에게 새 앨범 작업의 인트로 곡을 피아노와 현악기를 사용해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음악이 앨범에 수록되고, 레이블 관계자의 눈에 띄게 되면서 ‘이런 풍의 음악으로 앨범을 만들어볼 생각이 있’느냐는 반가운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

Look to the East, look to the West / Camera Obscura

이미지
카메라 옵스큐라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한 인디 팝 그룹이다. 199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2024년인 지금까지 모두 여섯 장의 정규 앨범을 내놓았다. 앨범 작업은 2000년대 초반에 몰려 있고, 2013년 발표한 <Desire Lines> 이후 3년 정도 휴지기를 가졌다. <Desire Lines> 녹음 기간 중 키보디스트 캐리 랜더(Carey Lander)가 암을 진단받았고, 결국 그녀는 투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트래시앤 캠벨은 가디언을 통해 캐리는 멤버들 가운데 유일하게 음악을 전공한 멤버였고, 자신과 절친과도 같은 사이로 지내며 많은 격려와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캐리의 죽음 이후 3년이 흐른 2018년이 되어서야 카메라 옵스큐라 멤버들은 다시 모여 음악 이야기를 이어가 볼 수 있었다. 올해 5월에 나온 <Look to the East, look to the West>는 그렇게 만들어진 그룹의 최근작이다. 한층 성숙한 시선으로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소박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변함없이 가지고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커버 사진 속 다소곳이 앉은 모델의 모습과 잔잔한 강변 풍경이 전해주는 평화로움처럼 음악도 듣기 좋고 깊이 생각할 것 없는 감미로움으로 청자를 인도하고 있었다. Liberty Print는 로파이 비트 분위기로 시작되면서 10년의 공백이 무색한 젊음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뒤를 잇는 We’re Going to Make it in a Man’s World에서는 새로 영입된 키보드 연주자 도나 마시오샤(Donna Maciocia)와 트래시앤 캠벨, 두 여성 멤버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아무래도 이 곡이 선명히 내보이는 페미니즘적 제스처를 강조하는 데 목적을 둔 방식으로 이해가 된다. 이 곡은 영화 제작자이자 예술가인 마가렛 살몬(Margaret Salmon)의 영화 "Icarus (after Amelia)"--글래스고 여성들이 다양한 ...

Definitely Maybe / Oasis

이미지
아무래도 지금은 오아시스의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시기인 것 같다. 2009년 8월 해체를 선언한 다음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는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로, 리암 갤러거(Noel Gallagher)도 솔로 활동을 해 나가고 있었지만, 2024년 8월 오랜 불화 관계에 놓여 있던 두 사람은 마침내 오아시스 재결합으로 뜻을 모아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재결합 발표를 즈음해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가 30주년을 맞았다. 이 앨범은 1994년 처음 발표되었을 때 즉각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중적인 지지뿐만 아니라 비평적 찬사도 이어졌다. 오아시스가 보여준 세계는 당시 미국에서 부상하던 그런지 음악과 차별화되는 낙관적 발상과 동적 에너지를 담고, 80년대 영국 록 음악의 유산을 수용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음울하던 분위기에서 탈피하는, 말 그대로 오아시스만의 개성과 실감 나는 사운드로 록과 대중문화에 활력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특히 호평을 얻어 왔다. <Definitely Maybe>는 흔히 ‘브릿팝'이라 일컬어지는 영국 록 음악의 토대를 마련한 기념비적 앨범 중 하나다. 지금은 그저 한 시대를 풍미한 사조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1990년대 당시 만들어진 브릿팝 음악들은 그야말로 비범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스웨이드, 블러, 오아시스, 펄프로 대두되는 브릿팝 그룹들은 지금도 팬들의 사랑과 충성심을 쉽게 거머쥘 만한 위력을 가졌다. 오아시스 재결합에 대해 보인 열띤 반응은 브릿팝의 잠재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Definitely Maybe>에서 가사는 지극히 현실에 기반해 단순하고 간결하게 쓰였다. 상상력을 비약시키거나 의미를 비틀어 시적 효과로 확장하는 등 수사적 형태를 고심해 구축하지는 않았다. 상상력은 현실의 압박에 의해 ...

벌새 Soundtrack / Matija Strniša

이미지
1990년대를 묘사할 때 영화는 그 시절이 가지는 고유한 향기를 동반하는 것 같다. 다가올 밀레니엄의 기대와 불안 아래에서 격변이 현실로 일어나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X세대, 오렌지족, PC 통신, 서태지와 아이들 등 90년대에 상징적으로 떠올랐던 문화는 7-80년대와도 구분되고 2000년대와도 차별화되는 특성을 보이는 것 같다. 90년대는 ‘삐삐'의 시대이기도 하다. 삐삐의 액정 화면에 뜬 숫자로 상대방의 뜻을 해독하고 음성 메시지를 듣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던 시절. 영화에서 삐삐가 스토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장면은 없었지만 문득 sns 없이 소통하던 시절을 돌아 보니 사람 대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생생하게 이루어지고 구두적 약속에 더 신중해지며 그리움도 커져 감성적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풍부하지 않았는지 묻게 된다. 영화는 바로 그 시절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벌새>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제법 다양해 보인다. 90년대 서울의 모습, 교육 환경, 가정 내의 불화,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인권 유린과 억압, 소녀의 사춘기, 여성이 여성과 교류하는 양상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등 여러 가지 복합성을 띠는 주제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그려졌는데 그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던 부분은 가족의 모습이었다. 은희네 가족은 겉보기엔 무척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바람 잘 날이 없다. 수희와 은희가 나란히 누워 ‘우리 집은 콩가루 집안’이라 말하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 다 따로 살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은희의 아빠는 가부장 캐릭터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는 자기만의 취미가 있고, 가족들 앞에서 늘 호통치는 것 같은데 막내딸의 병원행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의사로부터 수술 후유증에 관한 설명을 듣고는 불현듯 딸을 걱정하며 눈물을 터뜨리기도 하는 등 낭만성을 간직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다. 모순점을 가진 캐릭터라기보다는 오히려 가부장 역할이야말로 허상인 듯 느껴지는 측면이 더 강했다. 저마다 각자...